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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겨울의 사랑 겨울의 사랑최하림 겨울의 뒤를 따라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바람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길을 달리는 행상들에게나 돌가루 냄새가 코를 찌르는 광산촌의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그리고 오래 굶주릴수록 억세어진 골목의 아이들에게 바람은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일러주었다. 바람은 언제나 같은 어조로 일러주었다 처음 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반복의 강도 속에서 원한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원한은 되풀이 되풀이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여인을 또다시 벌거벗게 하고 저녁거리 없는 자를 또다시 저녁거리 없게 하고 맞아죽은 놈의 자식을 또다시 맞아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게 하는 것이다 아아 짓밟힌 풀포기 밑에서도 일어나는 바람의 시인이..
최영미 시인 : 속초에서 속초에서-최영미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살이 있었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드문드문 건져올린 기억으로 가까운 모래밭을 두어번 공격하다보면어느새 날 저물어, 소문대로 갈매기는 철없이 어깨춤을 추었다.지루한 비행 끝에 젖은 자리가 마를 만하면 다시 일어나 하얀 거품 쏟으며 그는 떠났다. 기다릴 듯 그 밑에 몸져누운 이마여- 자고 나면 한 부대씩 구름 몰려오고 귀밑털에 걸린 마지막 파도 소리는 꼭 폭탄 터지는 듯 크게 울렸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살이 있었다 더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데 비가 내리고,어디 누우나 비 오는 밤이면 커튼처럼 끌리는 비린내,비릿한 한움큼조차 쫒아내지 못한 세월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밤이 깊어가고처벅처벅 해안선 따라 ..
황지우 시인 : 늙어가는 아내에게 "늙어가는 아내에게“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내가 말했잖아.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사랑하는 사람들은,너, 나 사랑해?묻질 않어그냥, 그래,그냥 살아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그대 웃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나태주 시 : 놓아라 놓아라나태주 우선 네 손에 쥐고 있는 것부터 놓아라.네가 보고 있는 것을 놓고네가 듣고 있는 것을 놓아라. 내친김에 네가 생각하는 것을 놓아라.무엇보다도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놓아라. 그 위에 너 자신을 놓아라.비로소 편안해질 것이다
곽재구 시 : 사평역에서 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
김윤성 시인 : 나무 나무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나무를 보며황금색(黃金色) 햇빛과 개인 하늘을나는 잊었다.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忘却) 속에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시작(始作)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沈黙)은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누구에게 감사(感謝) 받을 생각도 없이나는 나에게 황홀(恍惚)을 느낄 뿐이다.
김선우 시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허영숙 시인 : 커피를 내리며 커피를 내리며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하늘의 높이를 재려한 얄팍한 깊이로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유리벽을 사이에 두고마주보는 것처럼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애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가끔은 아주 가끔은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눈물 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걸러내어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서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허영숙은 한국의 시인으로,..
정호승 시인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장을 끼고 더러는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
나희덕 :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나희덕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보다'라는 동사는 때로 조사나 부사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하느님이 부사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양치기가 사제보다 더 숭고할 수 있는 건바로 부사 때문이에요양치기가 어떻게 양들을 불러 모았는지그때 눈빛은 어땠는지목소리는 얼마나 다정했는지해 질 무렵 어둠은 얼마나 천천히 걸어왔는지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돌아왔는지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얼마나 많이 피어있었는지부사로 이루어진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부사는 희미한 그림자 같아서부사 곁에서는 마음도 발소리를 낮춘답니다 '천천히'라는 부사는 얼마나 천천히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