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46) 썸네일형 리스트형 곽재구 시 : 사평역에서 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 김윤성 시인 : 나무 나무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나무를 보며황금색(黃金色) 햇빛과 개인 하늘을나는 잊었다.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忘却) 속에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시작(始作)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沈黙)은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누구에게 감사(感謝) 받을 생각도 없이나는 나에게 황홀(恍惚)을 느낄 뿐이다. 김선우 시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허영숙 시인 : 커피를 내리며 커피를 내리며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하늘의 높이를 재려한 얄팍한 깊이로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유리벽을 사이에 두고마주보는 것처럼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애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가끔은 아주 가끔은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눈물 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걸러내어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서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허영숙은 한국의 시인으로,.. 정호승 시인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장을 끼고 더러는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 나희덕 :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나희덕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보다'라는 동사는 때로 조사나 부사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하느님이 부사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양치기가 사제보다 더 숭고할 수 있는 건바로 부사 때문이에요양치기가 어떻게 양들을 불러 모았는지그때 눈빛은 어땠는지목소리는 얼마나 다정했는지해 질 무렵 어둠은 얼마나 천천히 걸어왔는지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돌아왔는지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얼마나 많이 피어있었는지부사로 이루어진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부사는 희미한 그림자 같아서부사 곁에서는 마음도 발소리를 낮춘답니다 '천천히'라는 부사는 얼마나 천천히 어.. 나희덕 시 귀뚜라 귀뚜라미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정호승 시 : 새벽 눈길 새벽 눈길정호승 눈길을 걸을 때에는 눈을 밟지 않아야 한다 특히 첫눈 내린 길을 걸을 때에는 첫눈을 밟지 않아야 한다 눈길을 걸을 때에는 혼자 걷지 않도록 조심ㅡ해야 한다 공연히 눈길에 심장을 버리고 저 혼자 서럽게 울지 않아야 한다 눈길을 걸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눈길에 더러운 내 발자국은 남기지 않아야 한다 눈길을 걸을 때에는 코트 깃을 세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바라보면서 바람에 툭툭 눈 뭉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흰 눈을 떨치고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걸어가야 한다 -정호승, 눈길 걷는 법- 천양희 시 : 몇 번의 겨울 몇 번의 겨울천양희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지니온갖 목숨이 아까운 계절입니다 어떤 계절이 좋으냐고 그대가 물으시면다음 계절이라고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봄이라고아주 평범한 말로마음을 움직이겠습니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이저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간절한 것에끝은 없을 것입니다 -천양희,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중 고철 시인 : 마당에 앉아 있으면 마당에 앉아 있으면고철 별이 찾아오는 시간은 고요하다 달 찾아오는 시간은 더 고요하다 다저녁 마당에 앉아 있으면 그걸 금방 안다눈 감고 있으면 고요하다 귀 감고 있으면 더 고요하다 천 년이 그랬던 것처럼 고요가 시끄러운 적은 없었다저쪽에는 저쪽의 고요가 있다 이쪽에는 이쪽의 고요가 있다 저 산에는 저 산의 새가 있다 이 산에는 이 산의 새가 있다마당에 앉아 있으면 안다성공하지 못한 혁명군이 울면서 지났을 테고파랑새가 파랑(波浪)을 견디며 지났을 테고대포나 수류탄도 지났을 테고역병의 팬-데-믹 같은 녹두꽃 지났을 테고마당에 앉아 있으면 안다그저께같이 개망초꽃 피었다 내 몸에도 고요가 생겨서인지 소나기 구르는데도 참견하지 않았다 다소 쓸쓸하지만 나는 마당하고 고요가 참 좋다 고철의 『극단적 흰빛.. 이전 1 2 3 4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