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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장환 소개와 시 소개

 

시인 오장환 소개

 

오장환(1918년 5월 15일 ~ 1951년)은 한국의 시인이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다.

 

 

오장환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였으나,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던 중 월북했다. 1935년 1월 26일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그는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따르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11월 《낭만》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하였다.

 

그 해에 첫 시집 《종가》를 출판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검열로 무산되었다. 1937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문과 문예과 별과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그는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첫 시집 《성벽》을 자비출판하였다.

 

1938년 7월 22일 아버지 오학근의 사망으로 메이지 대학을 중퇴하고 급히 유학을 마쳤다.[7]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차리고, 그곳에서 다양한 문인과 교류하였다. 두 번째 시집 《헌사》(1939년), 서정주의 《화사집》(1938년), 김광균의 《와사등》 모두 이곳에서 출판하였다.

 

1940년경에는 중국 일대를 방랑하다가 경성부 돈암정 105번지로 이사하였다.1940년-41년에는 도쿄에서 사자업(寫字業)을 하며 가난하게 지냈고,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을 앓았다. 수술 결정을 앞두고 있어 외출이 금지되었던 병상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0월 22일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

1946년 5월 동향사에서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을, 같은 해 7월 정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하였다. [ 1946년 12월 19일 장정인과 결혼하였다

 1947년 1월 아문각에서 6편의 시를 추가한 《성벽》의 개정 증보판을, 같은 해 6월 헌 문사에서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좌익 계통에서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년 6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문화 대중화 운동인 문화공작대에 참여하여 경상남도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국가의 검열과 공연 중지 시도, 그리고 폭탄 테러 등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고, 그 자신은 테러 피해를 입어 상해를 입고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에 치료와 이념 실현을 위하여 1947년 9월 이후 월북하였다. 월북 시기가 분명치 않은 것은 당시 오장환이 조선문학가동맹 등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테러로 다쳤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등 몇 차례 남북을 오간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1948년 7월에 조선인민출판사에서 《남조선의 문학예술》을 출판하였고,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포의 소련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48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모스크바의 시립 볼킨병원에서 요양하였다.

 

1950년 5월 소련 생활 당시의 체험을 담은 마지막 시집 《붉은 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판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잠시 서울로 와 이전에 만났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알려진 오장환의 마지막 작품은 《조선여성》 1951년 5월호에 실린 〈시골길〉로,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1년 한국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집으로는 《성벽》(1937년), 《헌사》(1939년), 《병든 서울》(1946년), 《나 사는 곳》(1947년), 《붉은 기》(1950년) 등이 있다. 이 중 《병든 서울》은 조정래의 역사소설 《태백산맥》에 발췌되었다. 1982년 군산에서 발생한 간첩 날조 사건인 오송회 사건은 고교 교사들이 《병든 서울》을 돌려 읽은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시 소개

 

 

마지막 기차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가인을 만나면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발자취 찾아

 

맑은 하늘!

빤작이는 별

은갈구리 쪼각달은

조으는 듯

은빛 모래벌에

말없이 어리대는 여윈 어린이

(돌아가신 엄마의 환영만이 뵈이리)

어머니를 여윈 어린 마음

발자취나마 그리워

이곳을 찾아옴인가! 

오! 애처로 워라

엄마를 여윈 가엾은 신세!

발자취마저 

물길에 쓸려감이랴!

 

 

 

 

 

 

우기

 

장판방엔 곰팡이가 목화송이 피듯 피어났고

이 방 주인은 막벌이꾼 지게목

바리도 훈김이 서리어 올랐다.

방바닥도 눅진눅진하고 배창자도 눅진눅진하여

공복은 헝겊오라기처럼 뀌어져 나오고

와그르르 와그르르 숭얼거리어

뒷간 문 턱을 드나들다 고이를 적셨다.

 

 

 

 

 

 

 

전설

 

느티나무 속에선

올빼미가 울었다.

밤이면 운다.

항상, 음습한 바람은

얕게 내려앉았다.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올빼미는 동화 속에 산다.

동리 아이 들은

충충한 나무 밑을 무서워한다.

 

 

 

 

 

 

 

성씨보(姓氏譜)-오래인 관습-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 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지는 진실 이가엿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소야(小夜)의 노래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드런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 기울어 낙엽송에 쌓인 눈 바람에 흐트러지고

산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에 내려 

비애를 적시울 듯

도형수(徒刑囚)의 발은 무겁다.

 

(소야 : 밤이라는 억압적인 현실에  느끼는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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