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83) 썸네일형 리스트형 허영숙 시인 : 커피를 내리며 커피를 내리며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하늘의 높이를 재려한 얄팍한 깊이로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유리벽을 사이에 두고마주보는 것처럼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애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가끔은 아주 가끔은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눈물 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걸러내어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서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허영숙은 한국의 시인으로,.. 정호승 시인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장을 끼고 더러는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 나희덕 :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나희덕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보다'라는 동사는 때로 조사나 부사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하느님이 부사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양치기가 사제보다 더 숭고할 수 있는 건바로 부사 때문이에요양치기가 어떻게 양들을 불러 모았는지그때 눈빛은 어땠는지목소리는 얼마나 다정했는지해 질 무렵 어둠은 얼마나 천천히 걸어왔는지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돌아왔는지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얼마나 많이 피어있었는지부사로 이루어진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부사는 희미한 그림자 같아서부사 곁에서는 마음도 발소리를 낮춘답니다 '천천히'라는 부사는 얼마나 천천히 어.. 나희덕 시 귀뚜라미 귀뚜라미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정호승 시 : 새벽 눈길 새벽 눈길정호승 눈길을 걸을 때에는 눈을 밟지 않아야 한다 특히 첫눈 내린 길을 걸을 때에는 첫눈을 밟지 않아야 한다 눈길을 걸을 때에는 혼자 걷지 않도록 조심ㅡ해야 한다 공연히 눈길에 심장을 버리고 저 혼자 서럽게 울지 않아야 한다 눈길을 걸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눈길에 더러운 내 발자국은 남기지 않아야 한다 눈길을 걸을 때에는 코트 깃을 세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바라보면서 바람에 툭툭 눈 뭉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흰 눈을 떨치고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걸어가야 한다 -정호승, 눈길 걷는 법- 천양희 시 : 몇 번의 겨울 몇 번의 겨울천양희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지니온갖 목숨이 아까운 계절입니다 어떤 계절이 좋으냐고 그대가 물으시면다음 계절이라고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봄이라고아주 평범한 말로마음을 움직이겠습니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이저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간절한 것에끝은 없을 것입니다 -천양희,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중 고철 시인 : 마당에 앉아 있으면 마당에 앉아 있으면고철 별이 찾아오는 시간은 고요하다 달 찾아오는 시간은 더 고요하다 다저녁 마당에 앉아 있으면 그걸 금방 안다눈 감고 있으면 고요하다 귀 감고 있으면 더 고요하다 천 년이 그랬던 것처럼 고요가 시끄러운 적은 없었다저쪽에는 저쪽의 고요가 있다 이쪽에는 이쪽의 고요가 있다 저 산에는 저 산의 새가 있다 이 산에는 이 산의 새가 있다마당에 앉아 있으면 안다성공하지 못한 혁명군이 울면서 지났을 테고파랑새가 파랑(波浪)을 견디며 지났을 테고대포나 수류탄도 지났을 테고역병의 팬-데-믹 같은 녹두꽃 지났을 테고마당에 앉아 있으면 안다그저께같이 개망초꽃 피었다 내 몸에도 고요가 생겨서인지 소나기 구르는데도 참견하지 않았다 다소 쓸쓸하지만 나는 마당하고 고요가 참 좋다 고철의 『극단적 흰빛.. 바람에 관한 시 6편 바람에 관한 시 바람의 두께안도현 씨근덕씨근덕 그렇게도 몇날을 울던제 울음소리를 잘게 썰어 햇볕에다 마구 버무리던매미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때맞춰 배롱나무는 달고 있던 귀고리들을 모두 떼어냈습니다울음도 꽃도 처연한 무늬만 남았습니다 바람의 두께가 얇아졌습니다 - 안도현,『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바람의 길 조용미 창 밖에 바람이 불고 있다웅 웅불길하게, 지상의 모든 전깃줄을 다 쓰다듬으며바람은이승의 옷자락을 흔들어대고 있다 검은 비닐봉지가창 밑에서 휙 솟았다 날아간다 이런 날이면 바람의 길을 묻는 자들이길가에 무리지어 나와우두커니 서 있다가집으로 들어가기도 할 것이다 아주 높은 곳에서바람의 길을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다바람의 길 저쪽에나를 아는 누가.. 바람에 관한 시 바람에 관한 시 바람 곽재구 바람이사스레피 꽃 자주색 가지에 앉아박하사탕 두 알 줄 터이니방금 쓴 시를 다오 한다나는 박하사탕 두 알과 시를 바꾸었는데강변 토끼풀 꽃들이 그것을 알고주세요 주세요 하얀 손바닥을 내미는 것이었다 - 곽재구,『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바람에게 말한다 김남조 바람은 안 보인다 하는가나뭇잎 수런거림이바람의 모습강기슭 잔물결은바람의 문양앞뒤좌우 바람손님이니 나는바람과의 동거여라 바람에게 말한다긴 세월 바람 있어 환하게 잘 지냈는데오늘도 눈 밝고 귀 밝아바람을 알아보니지극 감사하다고 바람에게 말한다세상에 못다 갚을 내 모든 은혜의 빛을바람에게 물려줄 일미리 사죄한다고바람과 살았으니 바람 외엔상속자가 없다고 - 김남조,『심장이 .. 김종삼 시 : 묵 묵화 墨畵 김종삼물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이전 1 2 3 4 5 6 7 8 ···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