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커피
오탁번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산자락 옹긋옹긋한 무덤들이 이승보다 더 포근하다
채반에서 첫잠 든 누에가 두잠 석잠 다 자고
섶에 올라 젖빛 고치를 짓듯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 마시며
저승의 잠이나 푹 자고 싶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 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커피 가는 시간
문정희
아직도 쓸데없는 것만 사랑하고 있어요 가령 노래라든가 그리움 같은 것 상처와 빗방울을
그리고 가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어머니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요 밥보다 시커먼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몇 권의 책을 끼고 잠들며 직업보다 떠돌기를 더 좋아하고 있어요 바람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홀로 가는 별과 사막을 미친 폭풍우를 사랑하고 있어요
전쟁터나 하수구에 돈이 있다는 것쯤 알긴 하지만 그래서 친구 중엔 도회로 떠나 하수구에 손을 넣고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단 한 구절의 성경도 단 한 소절의 반야심경도 못 외는 사람들이 성자처럼 흰옷을 입고 땅 파며 살고 있는 고향 같은 나라를 그리며 오늘도 마른 흙을 갈고 있어요, 어머니
잔치커피
김수열
섬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도 잔치커피를 마신다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섬사람들은 잔치커피라고 하는데 장례식장에 조문 가서 식사를 마치면 부름씨하는 사람이 와서 묻는다 녹차? 잔치커피?
잔치커피, 하고 주문하는 순간 장례식장 '장'자는 휙 날아가고 순간 예식장으로 탈바꿈한다 명복을 비는 마음이야 어디 가겠냐만 왁지지껄 흥성스러운 잔치판이 된다 보내는 상주도 떠나는 망자도 덜 슬퍼진다
섬에서는
죽음도 축제가 되어 섬에서 죽으면 죽어서 떠나는 날이 잔칫날이다 망자 데리러 온 저승사자도 달콤한 잔치커피에 중독이 된다
커피하우스 '거기'
홍은택
여기가 '거기'인가요?
거기엘 가면 호숫가 나무 밑으로 밀려드는 물살의 두근거림이 있다 물살 위 첨벙거리며 노는 바람의 여린 발목이 보인다
거기엘 가면 시간의 서랍에서 꺼낸 향나무연필 깎는 냄새가 난다 산 쪽으로 난 창에선 잔별들이 짤랑거리는 거기선 젖은 기억들이 다시 젖는다
마음속 터 잡은 단단한 옹이 하나 몸 밖으로 밀어내도 안으로만 숨어들 때 그윽한 커피향 보드란 털실처럼 풀려 나오는
거기
내 가난한 그리움을 맡겨두고 왔다
여기가 '거기'인가요?
역전 스타벅스 / 허연
아침이면 지정석이 채워진다 커피는 주문하지 않는다 이곳은 시험장처럼 조용하고 역대급 사연들이 눈을 깔고 회상에 잠겨 있다 알바생이 지나가면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한 두어 달 말 한마디 안 했을 것 같은 얼굴들이 찰흙처럼 앉아 있다 어깨를 버리고 온 사람들은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세상이 당장 멸망할 것 같지만 문만 열고 나가면 세상은 여전하다 세상은 여기서만 무겁다 간혹 누군가 가벼워졌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이내 먼지가 소식을 덮는다
해가 중천에 뜨면 밀랍인형들이 일어나 노파의 주름 닮은 골목으로 사라진다
선캄브리아기 생명체들이 바다를 떠나 세상으로 기어오르는 것이다
어느 날의 커피
이해인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아무리 읽어 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식히고
마시는 뜨거운 한 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커피를 마시며
신달자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 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 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 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사약처럼 커피를 마신다
커피 같은 그대
이채
추웠어요. 그래서
커피처럼 따뜻한 그대가 좋았어요
유달리 그대가 포근했기에
안기고 싶었어요. 그러면
춥지 않을 것도 같았어요.
외로웠어요. 그래서
설탕처럼 달콤한 사랑이 필요했어요
오직 그대만을 원했기에
만나고, 또 만나고 싶었어요. 그러면
외롭지 않을 것도 같았어요
조금은 고독했어요. 때로
프림처럼 부드러운 그대품에서
불현 듯 다가오는 고독쯤이야
커피향에 날려 보내고
차가운 가슴 그대 사랑으로 채울 수 있었어요.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땐
달지도 쓰지도 않은
담백하고도 담담한 향기였지만
점차 그대에게
단맛을 느끼게 되었지요
추웠기에
커피처럼 따뜻한 그대가 좋았고
외로웠기에
설탕처럼 달콤한 사랑을 했지만
원래 커피는 쓰다는 것을...
그대 가고 없어
설탕도 프림도 타지 않은
조금은 쓴 커피를 마시며, 사실은
사실은 그 쓴맛도
예전에 달콤했던 그대의 향기라는 것을...
가을비 속으로
목필균
체온을 낮추고 있다
창문 가득 기웃거리는 빗방울
스치는 찬기로 오소소 돋는 소름
동공속으로 잠기는 우수
온기없이 견디는 밤에
신열이 오른다
따뜻한 목소리
서늘한 눈빛이
포근한 가슴이
만지고 싶다
출렁거리던 그리움
싸늘한 커피잔에 넘친다
추적거리는 비가
선명하게 그려낸 얼굴
맥박이 낮아지고
체온이 떨어지며
넘치는 그리움 속으로
온몸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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