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박형준

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 볼 뿐이에요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 거림을 사랑하지요
예언적인 강풍이 창을 때리는 겨울엔
그 반향으로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지만
나는 벽에 부딪혀 텅 빈 방 안을 울리는 메아리와 말과
창밖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식사를 하고
매일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순간 속에 마련할 뿐
죽음이 뻔뻔하게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안을 드러내는 밤중엔
여유롭게 횡단하지요, 나는 어둔 책 속에 발을 담그지 않아요
그저 책상에 흐르는 강물 끝에 손을 적실 수 있을 뿐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
검은 눈의 처녀가 걸어 나오는 시각엔
바람의 냄새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대양을 꿈꾸지요
'생각날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시집/문학과 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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