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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시인의 시 : 책 책상박형준 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 볼 뿐이에요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 거림을 사랑하지요 예언적인 강풍이 창을 때리는 겨울엔 그 반향으로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지만 나는 벽에 부딪혀 텅 빈 방 안을 울리는 메아리와 말과 창밖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식사를 하고 매일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순간 속에 마련할 뿐 죽음이 뻔뻔하게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안을 드러내는 밤중엔 여유롭게 횡단하지요, 나는 어둔 책 속에 발을 담그지 않아요 그저 책상에 흐르는 강물 끝에 손을 적실 수 있을 뿐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 검은 눈의 처녀가 걸어 나오는 시각엔 ..
김광규 시인 소개와 시 한 김광규 시인은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한양대학교에서 독문학 교수로 재직 중, 1975년 「문학과 지성」에 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으로 등단하였고, 이후 1981년 녹원문학상-오늘의작가상, 1984년 김수영문학상 수상하였습니다. 김광규의 시는 일상적 삶에서 얻은 구체적 체험을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시어로 표현한 일상시이면서 그 속에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묘비명」,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어린 게의 죽음」, 「아니리」, 「도다리 를 먹으며」, 「상행」, 「서울꿩」, 「생각의 사이」 등이 있습니다. 김광규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
김용택 시 : 사랑 사랑 / 김용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
최하림 시인 : 겨울의 사랑 겨울의 사랑최하림 겨울의 뒤를 따라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바람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길을 달리는 행상들에게나 돌가루 냄새가 코를 찌르는 광산촌의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그리고 오래 굶주릴수록 억세어진 골목의 아이들에게 바람은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일러주었다. 바람은 언제나 같은 어조로 일러주었다 처음 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반복의 강도 속에서 원한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원한은 되풀이 되풀이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여인을 또다시 벌거벗게 하고 저녁거리 없는 자를 또다시 저녁거리 없게 하고 맞아죽은 놈의 자식을 또다시 맞아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게 하는 것이다 아아 짓밟힌 풀포기 밑에서도 일어나는 바람의 시인이..
최영미 시인 : 속초에서 속초에서-최영미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살이 있었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드문드문 건져올린 기억으로 가까운 모래밭을 두어번 공격하다보면어느새 날 저물어, 소문대로 갈매기는 철없이 어깨춤을 추었다.지루한 비행 끝에 젖은 자리가 마를 만하면 다시 일어나 하얀 거품 쏟으며 그는 떠났다. 기다릴 듯 그 밑에 몸져누운 이마여- 자고 나면 한 부대씩 구름 몰려오고 귀밑털에 걸린 마지막 파도 소리는 꼭 폭탄 터지는 듯 크게 울렸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살이 있었다 더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데 비가 내리고,어디 누우나 비 오는 밤이면 커튼처럼 끌리는 비린내,비릿한 한움큼조차 쫒아내지 못한 세월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밤이 깊어가고처벅처벅 해안선 따라 ..
황지우 시인 : 늙어가는 아내에게 "늙어가는 아내에게“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내가 말했잖아.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사랑하는 사람들은,너, 나 사랑해?묻질 않어그냥, 그래,그냥 살아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그대 웃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나태주 시 : 놓아라 놓아라나태주 우선 네 손에 쥐고 있는 것부터 놓아라.네가 보고 있는 것을 놓고네가 듣고 있는 것을 놓아라. 내친김에 네가 생각하는 것을 놓아라.무엇보다도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놓아라. 그 위에 너 자신을 놓아라.비로소 편안해질 것이다
곽재구 시 : 사평역에서 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
김윤성 시인 : 나무 나무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나무를 보며황금색(黃金色) 햇빛과 개인 하늘을나는 잊었다.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忘却) 속에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시작(始作)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沈黙)은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누구에게 감사(感謝) 받을 생각도 없이나는 나에게 황홀(恍惚)을 느낄 뿐이다.
김선우 시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