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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의 시 소개

황동규 시인의 시 소개

 

 

 

 

 

꽃의 고요

 

 

일고 지는 바람 따라 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봄비를 맞다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

갑작스런 봄비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자 마음이 말했다.
'이마를 짚어봐.‘

 

듣는 체 마는 체 들으며 생각한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
머리와 옷이 조금씩 젖어왔지만

급히 피할 수는 없었어.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

 

이마에 손 얹어보니

열이 있는 듯 없는 듯.
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
일어나 커피포트에 불을 넣는다.

 

 

 

 

 

 

 

 

흩날리는 눈발

 

평생 책들과 얽히고설켜 살아왔지만

이즘 와서 책과 만나는 일이

풍 빠졌다 아뿔싸 기어 나오는 허방다리 되었다.

시력 저하로 읽는 속도 확 줄기도 했지만

책을 한번 들면

약 들 시간 약속 시간 같은 게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다.

약도 어디 한두 가진가.

 

며칠 전,

미뤄뒀던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다가

약속 시간 한참 놓치고 서둘러 집을 나섰지.

내려갔던 엘리베이터 다시 타고 올라와

허둥지둥 마스크 찾았어.

 

그리고 바로 오늘 아침,

약 들 시간 꽤 남았다고 후배 하응백이 보내 준

물고기들이 유머러스하게 자기소개하는

묘한 산문집을 읽다가

 

화급히 마스크 집어 들고 집을 나서

막 와 닿는 마을버스 잡아타고 전철역에 갔지.

아차, 혈압약! 이 강추위에!

그 버스로 되돌아오며 휴대폰으로

시력 빠지니 약 찾아 먹기도 힘드네 어쩌구 하며

허방다리에서 기어 나왔어.

 

이러다 어느 날

풍 빠졌다 그만 기어 나오지 못하게 되겠지.

쳐들었던 두 팔 내려지고

영결식장 딸린 병원으로 데려갈 거야.

데려가기 전, 잠깐!

혼술하던 술병과 읽던 책 두어 권 품에 안고

지금처럼 창밖에 흩날리는 눈발을 보게 해 주게.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 2005년 8월 6일 오후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港 동편 성벽에 올라

비석에 망인의 이름 대신 자유인이라는 글발 몇을 적은

<희랍인 조르바> 작가의 무덤을 찾았다 ​

 

꽃 속에 꽃을 피운 부겐빌레아들이

성근 바람결에 속 얼굴을 내밀다 말다 했다.

오른팔을 약간 삐딱하게 치켜든 큰 나무 십자가 뒤에

이름 대신 누운 자가 '자유인'이라는 글발이 적힌 비석이 있고

생김새가 다른 열몇 나라 문자로 제각기 '평화'라고 쓴

조그만 동판(銅版)을 등에 박은 무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평화란 결국 살림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정성 들여 새기는 조그만 판인가?

내려다보이는 항구엔 크기 모양새 다른 배들이

약간은 헝클어진 채 평화롭게 모여 있다.

떨치듯이 떠나가는 배도 두엇 있다.

발밑에서 메뚜기가 튄다.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이,

그래,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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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

그리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 크레타섬 이라클리온 출신이다. 아테네에서 법학을 배웠고, 파리에서 베르그송과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였다.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역사상 위인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다. 당시 유럽의 철학·문예·사회사조 등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자연인의 본원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았으며, 그의 이러한 신념은 고향을 무대로 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

 

카잔차키스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는 자유롭다. 나는 자유...!

 

 

 

 

 

 

 

 

 

 

매화꽃 2

 

묏비(山雨) 막 개인 다음

되살아나는 매화꽃 냄새

깊이 마시면
머릿속 해골이 환해진다.
안구(眼球) 근처가 더 환해진다.
잠시 환등 켜진 것처럼

꺼져도 한참 환한 환등처럼.

 

 

 

 

 

 

한밤으로

 

우리 헤어질 땐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것을 노래 부를 힘만을

 

눈이 왔다, 열한 시
펑펑 눈이 왔다, 열한 시

 

창(窓) 밖에는 상록수(常綠樹)들 눈에 덮이고

무엇보다도 희고 아름다운 밤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눈이 왔다, 열두 시
눈이 왔다, 가버리지 않었다, 열두 시

 

너의 일생(一生)에 이처럼 조용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자물쇠 소리를 내지 말어라

열어두자 이처럼 고요한 곳에 우리의 헤어짐을

 

한시


어디 청춘(靑春)을 다 낭비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자(者)가 있으리오

어디 이 청춘(靑春)의 한 거리를 바삐 달릴 만큼 가난한 자(者) 있으리오

조용하다 지금 모든 것은

 

두시 두시


말해보라 무엇인가 네 골돌히 바래 온 것을

밤 새 오는 눈, 그것을 맞는 길

그리고 등(燈)을 잡고 섰는 나

말해보라 마음속의 마음속의 너의 말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

가만히 떠나갈 뿐이리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것을 노래 부를 힘만을.

 

 

 

 

 

 

 

풍장 1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 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달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무굴일기 1

 

 

갈수록 꿈이 쓸쓸해진다.

서로 다른 띠 두른 악몽들이 도처에 출몰해도 조그만 옥호 달고 파전에 술 파는 집들이

숨어 있는 골목들이 끝나고, 도시 변두리, 마지막 공연 끝낸

곡마단이 하늘 덮었던 천막을 막 거둔 정경. 북소리와 피리 소리 사라진

반쯤 뜯긴 무대와 반쯤 어두워진 하늘,

둥근 테이블 주위에 접이의자 몇이 둘러앉아 있는 장면.
언제 나타났는지 어리광대 옷에 뿔테안경 낀 성성(猩猩)이가

외서(外書) 하나를 옆구리에 낀 채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상자 위에 올라앉아 무연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만 석굴 속에서 참선하게 해 달라는 내 청을 주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곳은 거사 같은 분이 밤을 보낼 곳이 못 됩니다.

젊었을 때부터 돌과 함께 숨을 쉬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돌 빛에 큰 병들지요.'


손전등 빛 속 바위들의 감촉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속삭였다.

무(無)가 채 들어와 박히기 전 무 생각의 화강암 무늬들!

그러나 주지는 한번 살펴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얼굴을 했고,

바위들은 말을 삼가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굴 밖에는 바글바글한 햇살,

기다렸다는 듯 참으아리가 덩굴손을 내밀었다.

손을 마주 내밀자 몸 한구석이 저려왔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갈 준비돼 있다

 

눈이 너무 밝아 나무에서 곧잘 떨어진다는

뇌보다 더 큰 눈 가진 안경원숭이가 되어

제대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그러나 계속 진해만 가는

삶의 끄트머리
스위치 누르지 않아도

몸과 주위가 온통 환해지는 순간을

두 눈 크게 열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끄트머리도 없지요.
공기 속으로 채 풀어주지 못한 말이나 소리 같은 것

제멋대로 터지지 않게

목구멍 속 어디엔가 묻어두고

살다가 저절로 싱거워진 기쁨 같은 것도

새로 싹 틀까 않을까 걱정 말고

몸속 어디엔가 심어 두고,

화성이든 그 어디든

뇌 구석구석까지 환하게 비칠 항로의 끄트머리를

기다리겠습니다.
솜털구름 한 점 떠돌지 않는 화성의 하늘,

지구의 하늘보다 더 진하고 더 공(空)하겠지요.

 

 

 
봄비를 맞다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바닥없는 열정과 응시로 삶의 처처에서 발견하는 환한 깨달음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다.” ―「시인의 말」에서
저자
황동규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24.05.31
 
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면서 힘들었던 일들, 특히 이즈음 몸이 속을 바꾸며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일들을 시로 변형시켜 가지고 가고 싶다. 가지고 가다니, 어디로? 그런 생각은 지난날의 욕심이 아닌가? 그래? 그렇다면 못 가지고 가는 시를 쓰자.
저자
황동규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20.10.26
 
사는 기쁨
황동규 시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 195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끊이지 않는 시를 향한 열정을 보여준 저자의 이번 시집은 칠십대 중반이란 나이 때문에 발휘하게 된 환하고 따뜻한 상상력과 매너리즘을 거부하는 싱싱한 언어로 써내려간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상승하는 정신으로 삶의 생기가 가득한 저자의 시집에서 세월이 만든 담백한 풍경 속에 생의 경이를 발견하는 기쁨을 보여주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늙은 몸에 대해, 인생의 종점을 눈앞에 둔 처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코 어둡지 않은, 명랑성과 낙관성을 잃지 않는 메시지를 오롯이 담아낸 ‘그리움의 끄트머리는 부교(浮橋)이니’, ‘가을 저녁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두 달 반 만의 산책’, ‘무중력을 향하여’ 등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
황동규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13.01.25

 

 

 

 

 

 

황동규 시인의 시 3편과 시인 소개

황동규 시인의 시 3편 즐거운 편지 1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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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hXizFb39cM?si=1tKX1Av2V1j-A8x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