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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하시인 소개와 시 18편 소개

 

 

그리움은 게 한 마리의 걸음마처럼

 

끝간 데 없는 갯벌 위를 걷습니다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문득 손톱만 한 게 한 마리
휙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쩐지 그 게 한 마리의 걸음마가
바닷물을 기다리는
갯벌의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그 마음 그토록 허허롭고 고요하기에
푸른 물살, 온통 그 품에
억장 무너지듯 안기고 마는 걸까요
아아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당신이여
난 게 한 마리 지날 수 없는
꽉 찬 그리움으로
그대를 담으려 했습니다
그대 밀물로 밀려올 줄 알았습니다
텅텅 빈 갯벌 위, 난 지금
한 마리 작은 게처럼 고요히 걸어갑니다
이것이,
내 그리움의 첫걸음마입니다

 

 

 

 

 

 

 

 

바람 속에서

 

바람은 허공일 뿐인데

왜 지나온 시간 쪽으로 내 발길은

휘몰아쳐 가는가 뒤돌아보면,

살아낸 시간들 너무도 잠잠해

다만 바람의 취기에 마음을 떠밀렸을 뿐

눈밭에 흩뿌려진 별들의 깃털,

탱자나무 숲 굴뚝새의 눈동자

달빛 먹은 할아버지 문풍지 같은 뒷모습

산비둘기와 바꾸고 싶던 영혼,

얼마를 더 떠밀려 가야

생의 상처 꽃가루로 흩날리며

바람에 가슴 다치지 않는 나비나 될까

제 몸을 남김없이 허물어

끝내 머물 세상마저 흔적 없는

바람의 충만한 침묵이여

메마른 나뭇가지 하나의 흔들림에도

고통의 무게는 작용하는 것,

걸음이 걸음을 지우는 바람 속에서

나 마음 한 자락 날려 보내기엔

삶의 향기가 너무 무겁지 않은가

 

 

 

 

 

 

 

 

 


숲 하나, 달 두 개

 

그러나 난 노래할 것이다 물오리나무와
달개비꽃, 날아가는 저 노랑할미새-
그 온갖 살아 있는 움직임,
황홀한 순간의 운동성에 대하여

탱자꽃 피고 은하수는 폭발한다
거미는 말의 식욕을 풀어
나비의 관능을 사로잡고
휘파람새 날아올라 우주의 조롱 밖에서
내 노래를 조롱한다

, 올빼미의 눈
숲 하나, 달 두 개

, 바람은 이름을 얻지 못하는
들풀들의 흐느낌이 되어주고
그 흐느낌은 내 모든 세포들을 이끌어
저 들판에 풀씨처럼 춤추게 한다

자귀여, 불귀여
꿀벌의 등을 타고 나는 돌아갈 것이다
세상의 온갖 향기 붐비는 혀의 광장,
시가 꼴리는 꽃의 음문으로

 

 

 

 

 

 

 

 

 

 


미란타 1

 

지하철에서 아침 신문을 보다 일순 가슴이 덜컥했어
죽은 독재자가 대문짝만 하게 나를 노려보며
잔뜩 무게를 잡고 앉아 있더군 정, 신차리라고 보니까
그 독재자와 닮은 용모 때문에 단단히 한큐 잡은
탤런트가 위장약 선전을 하는 광고란이었어
나도 위장병으로 몇 개월 시달려봐서 아는데
쓰린 속을 달래는 데는 단연 미란타가 따봉이지
헌 위벽을 순식간에 땜빵해 주는 하얀 액의 위장약
근데 어느 날 의사가 미란타의 장복을 말리는 거야
식이 요법 같은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약의 효과는 극히 일시적이라는 거지
아니, 오히려 위를 더욱 해칠 수가 있대
그쪽 방면은 문외한이지만 그 말이 얼른 이해가 되더구먼
고통을 호소하는 위의 입을 콘크리트 쳐버리면
당장 침묵하겠지만 그게 어디 오래가겠어
한데 말야, 삼천만이 개운한 기분으로 펼쳐드는 아침신문에
오랜 위통처럼 만인을 괴롭히다 죽은 사람이 떡하니 나타나
아무런 미안타는 기색도 없이 미란타를 권하는 이 현 실을,
이따금 재발하는 위염의 쓰린 기운처럼 곰곰이 씹어대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고리짝 철 지난 약 선전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었어

그래도 보릿고개 때 생긴 위장병을 잡은 분이 바로 그분 아니오

 

 

 

 

 

 

 

 

 

 

푸른, 비닐우산을 펴면


빌딩들 사이에서 오백 원으로
급히 펼쳐든
푸른 비닐의 공간
난 오래 잊고 있었던 은행의 비밀 번호를
기억해 낸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
난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유일하게 빗방울들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푸른 비닐을 두드리며 황홀하게
나의 비밀 번호를 호명하는 물방울의 목소리
나는 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의 목소리를 닮은 사람이여
내게 예금되어진 건
소낙비를 완벽하게 긋는 박쥐 우산이 아니라
푸른 비닐의 공간을 가볍게 준비할 수 있는 능력,
비닐우산을 펴면
나는 푸른 비닐처럼 가볍게 비밀스러워진다
빗방울을 닮은 사람이
또박또박 부르는 비밀 번호 앞에서
천천히 열리는 꿈에 부풀기 시작한다

 

 

 

 

 

 

 

 

 

 

삼킬 수 없는 노래

 

시크리드*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갓 부화한 새끼들을 제 입 속에 넣어 기른다

새끼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로

그들은 자신의 입을 택한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미소처럼 머금은

시크리드 물고기


사람들아, 응시하라

삼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

이슬을 머금은 풀잎

봄비를 머금은 나무


그리고

끝내 삼킬 수 없는 노래의 목젖,

나도 한 세상

그곳에 살다 가리라

 

 

* 시크리드: 시크리드 과 물고기는 대다수가 아프리카 호수에 살고 있으며 마우스 브리딩, 즉 새끼

들을 입 안에 넣어 기른다

 

 

 

 

 

 

 


살구나무 있던 자리

 

살구나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면, 햇빛은

살구를 쥐어주던 누군가의 손길처럼 내려앉고

가슴속에 아직도 살구꽃 핀다

베어버린 살구나무와

벨 수 없었던 살구나무의 새콤한 精靈

정령이 살아남는 것은 그것의 움직임을

추억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난 꿈꾼다 욕정이 끝난 자리에도

사랑이 살구꽃처럼 피어나기를

욕정에 배부르기보다는

살구를 쥐어주던 손길의 따스한 여운에 배부르기를


지워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슬픔은 세월이 흐를수록

잘 익은 살구처럼 더욱 무거워지고

그래 추억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살구나무 자리 정령 그 분주한 움직임도 끝내 멈추리라

 

 

 

 

무화과나무에 기대어

 

 

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꽃시절을 세상에 바치고
자기 내부로 꽃을 피웠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무화과 꽃차례 속으로 들어가
나무에게 꽃가루를 전하고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생을 마치는 꿀벌들처럼,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택한 사람들

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별똥별의 길과
그 별똥별의 편도를 따라가버린 이들이
마침내 피워낸
보이지 않는 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바람이 낳은 달걀처럼

참새떼가 우르르 떨어져 내린

탱자나무 숲

기세등등 내뻗은 촘촘한 나무 가시 사이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참새들은 무사통과한다

(그 무사통과를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바람의 살결을 닮으려 애쓰는가)

기다란 탱자나무 숲

무성한 삶의 가시밭길을 뚫고

총총히 걸어가는 참새들의 행렬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가시의 마음을 닮으려 애쓰는가)

……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

그 열망 깊은 곳,

가시 무성하게 돋아난

선혈 낭자한 탱자나무 숲이여

 

 

재즈 2

 

나이를 먹을수록
욕망은 역한 하수구 냄새를 풍긴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더 잘 쓸 수 있으리라

난 모든 종류의 학교를 경멸해
한데 왜 아직도 모범답안의 미소 안에
갇혀 있는 걸까
두서없는 재즈의 육체가 부러웠어

너를 사랑한다, 말한 순간
너는 늘 거기에 없었지
헛세상, 헛마음, 헛기침
운명은 그저, 우주가 들려주는 소박한 선율이야

죽음은 좌절과 차원이 다른 것 같아
언제나 아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지
그러나 나는 결코,
삶이 죽음의 아류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네

저녁의 막막함을 통과한 자만이
아침 햇살에 눈 멀리라 믿어

가장 더러운 암흑은 자기 몸 안에 있지요
난 영원히 거기에 충실할 거야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매혹의 고통은 종종

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

하여 나의 질투는 공기보다 가볍다

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휘파람새가 비상하기 직전의 날개,

그 소리 없는 찰나의 전율을 빌려

난 너의 내부에 둥지를 튼다

 

 

 

게으른 가수의 사랑

 

생은 다른 곳에 있어요!

그대는 웃음 짓고,, 루루, 하릴없이

나의 게으른 상상력의 악어새

 

 

중독된 사랑

 

그 사람의 어떤 말과 행동이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한동안 깊은 마음의 병을 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사람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상처받았는지를

힘겹게 고백하려 하였으나, 막상

그토록 쓰린 아픔 이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굳은 약속을 파기한 그 순간, 내 가슴에 박혔던

그 사람의 구체적인 표정과 몸짓은

얼음 화살처럼 지워져 버렸고

오직 다친 마음의 흔적만이 모질게 나를 탓하였다

그럴수록, 난 고통을 견디기 위해

붉은 상처의 바깥에서 여전히 건재한

그 사람의 매혹에 얼굴을 파묻고,

사랑의 환희만을 안간힘으로 흡입했던 것이다

 

 

 

내 몸을 걸어가는 길

 

 

길은 미래를 향해 뻗어 있지만

그 길을 만든 건 추억이었다

......

실연의 신발은 속도를 갈망했고

사랑의 신발은 정지를 찬양했다

바뀐 사랑을 이끌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새로운 추억은 그보다 오래된 추억을 지웠고

가까운 미래는 더 먼 미래를 지웠다

하여, 미래와 추억은 어느 순간 길 위에서 만났다

......

 

 

재즈 1

 

난 이미지의 노예야,...... 하지만

그리움이, 더 이상 삶의 에너지가 아니길 바라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이 내가 짓눌릴 때,

영혼에 구멍을 뚫고 색소폰을 불고 싶어

 

 

 

재즈 2

저녁의 막막함을 통과한 자만이

아침 햇살에 눈멀리라 믿어

 

 

 

비틀즈

 

비틀즈는 사라지고

예스터데이----

비틀즈 목청만 남아

가버린 어제를 산다

어제를 부르는 비틀즈와

비틀즈를 부르는 어제의 그리움

예스터데이----

비틀즈르 흥얼거리던 여인은 사라지고,

비틀즈 노래만 남아

그녀의 어제로 나를 데려간다

 

 

 

 

어머니

 

 

아프리카 한 호수에 사는 물고기 중엔

일견 서로 다른 종류인 듯, 어미의 몸집이

아비에 비해 너무도 왜소한 것들이 있다

호수에 버려진 빈 달팽이 껍질 속에

알을 낳고 새끼들을 기르기 위해

아예 달팽이 몸의 크기로 진화된,

새끼의 안녕과 자기 본디의 몸을 맞바꾼

그 어미 물고기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누구나, 달팽이집 속에 산다

그녀들 생의 유일한 기쁨이 있다면,

달팽이집 밖의 세상을 잃어버린 고통의 힘으로

자신이 포기한 육신과 꿈의 부피 전부를

어린 자식들에게 남김없이 옮겨놓는 일,

무사히 자라난 자식들이 새삼 어머니의 왜소함을 비

웃고

뿔뿔이 흩어져갈 때에도,

그녀는 그 비좁은 달팽이집을 떠나지 못한다

다시는 달팽이집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커버린,

자식들의 낯선 눈동자에 감사하며

 

 

 

 

 

 

 

 

 

유 하 시인 소개와 시 10편

 

 

유하 시인 소개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세종대 영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6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이자 영화감독. 《무림일기》를 시작으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세상의 모든 저녁》 등의 시집을 발표해 시대의 정신과 풍경을 시의 언어로 포착해 냈다.

 

또한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감독으로 데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폭력의 시대를 영화적 향수의 대상으로 극화해 냈으며 〈비열한 거리〉로 현실에 단단히 발붙인 한국형 느와르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10년. 유하는 스스로 ‘나의 원체험이자 핵체험’이라고 밝힌 바 있는 ‘강남’과 ‘1970년대’로 다시 한번 눈을 돌린다. 가진 것 없이 폭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두 주인공 ‘종대’와 ‘용기’. 〈강남 1970〉은 꿈을 향해 도약했지만 결국 ‘비열한 거리’에 가닿을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모습으로 ‘거리 삼부작’을 완결한다.

 

필모그래피로는 2012 하울링 각본 / 감독, 2008 쌍화점 각본 / 감독, 2006 비열한 거리 각본 / 감독, 2004 말죽거리 잔혹사 각본 / 감독, 2001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각본 / 감독, 1993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각본 / 감독 등이 있다.

 

1996  김수영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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