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관한 시 10편 소개
꿈
이생진
이 세상에 없는 여자를
꿈에서 안아 보고 기뻐했다
꿈이 시키는 대로 간음하다가
사람에게 들키고는
밤새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었는데
날이 새어 꿈임을 알고 안심했으나
그녀가 없는 세상임을 알고는
다시 실망했다 (이생진·시인, 1929-)
새벽의 꿈
손희락
깊은 잠 꿈속에서
그립던 사람 만나서
행복했는데
홀연히 사라져 버린
새벽 4시 40분입니다
이야기꽃 피우던
순간들이 아쉬움으로 남아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재촉해 보아도
깨어버린 잠 열려 버린 새벽은
변함없이 찾아오는
한 사람의 방문자를 맞습니다
꿈속의 미소를
현실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리움의 갈증에 냉수만
한 사발 들이킵니다 (
꿈
조병화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https://youtu.be/d41zUoL40_c?si=7LLlQrbKADZglv2x
꿈일기 2
이해인
목마른 이들에게
물 한 잔씩 건네다가
꿈이 깨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물 한 잔 건네는
그런 마음으로
목마른 마음으로......
꿈에서
나는 때로
천사이지만
꿈을 깨면
자신의 목마름도
달래지 못합니다
꿈
오세영
꿈꾸는 악기 입을 버리고 말을 버리고, 춤추는 손으로 대답한다.
춤추는 가슴으로 대답한다.
우주는 주인 잃은 꿈꾸는 악기, 네가 울면 허공에 별 하나 뜨고 지상의 목숨들은 탈춤을 춘다.
떨리는 나뭇잎은 가지 끝에서 출렁이는 물결은 바닷가에서
꿈
공석진
주렁주렁
매달린
꿈
턱 괴고 모로 누워
그저 절로
떨어지기만
농익은 꿈이
짓물러 터지면
허사인 걸
나무에 올라가
가지 흔들어
작대기로 후려쳐
기다리는 꿈은
결코
꿈이 아니야
꿈
문정희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게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재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꼬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응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꾼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해변의 꿈
임보
아이들은 검은 발등으로
푸른 바다를 밀어내고
어린 게들은 작은 발톱으로
검은 섬을 밀어올리고…
https://youtu.be/lfXSTQDhUkc?si=eGqEL74dyFiHrb4r
꿈
이시영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말했다
바다 건너 서양나라에 가 부잣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공부 많이 한 학생이 되고 싶다고
칠년이 지나도 그 말이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어머니는 30년대 이 땅의 가난한 방직여공이셨다
돌멩이의 꿈
나호열
성난 발길질이라도 좋아
아무데나 내동댕이쳐진대도
따뜻한 그 손길에 닿을 수 있다면
날아가는 그 순간
짧은 꿈을 꾸는 나는 새가 되지
풀섶에 떨어진대도
물수제비 다 건너가지 못하는
강물 속에서라도
또 한 번의 그 손길을 기다리는
깊은 꿈을 가질 수 있다면
하찮은 돌멩이라도 좋아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가 아니어도 좋아
추락하면서
그대의 맑은 유리창을
깨지만 않는다면
달팽이의 꿈
이윤학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 않았다
보호색을 띠고 안주해 버림이 무서웠다
힘겨운 짐 하나 꾸리고
기우뚱기우뚱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얼굴을 내밀고 살고 싶었다 속살을
물 위에 싣고 춤추고 싶었다
꿈이 소박하면 현실은 속박쯤 되겠지
결국은 힘겨운 짐 하나 벗으러 가는 길
희망은 날개로 흩어진 미세한 먹이에 불과한 것이다
최초의 본능으로 미련을 버리자
또한 운명의 실패를 감아가며
덤프 트럭의 괴력을 흉내라도 내자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도 늘 제자리는 안될걸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입으로 깨물면 부서지고 마는
연체의 껍질을 쓰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https://youtu.be/NftQQRlrTuE?si=7QANtMAQGs0FXwx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