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 출판
- 숭실대학교출판부
- 출판일
- 2004.05.01
나무 안의 절
이성선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아름다운 사람
이성선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 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 저자
- 이희중, 최동호
- 출판
- 서정시학
- 출판일
- 2011.04.30
고향의 천정
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꽃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 저자
- 여태천, 최동호
- 출판
- 서정시학
- 출판일
- 2011.04.30
그냥 둔다
이성선
산 능선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마당의 잡초도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 저자
- 설악문화예술포럼
- 출판
- 서정시학
- 출판일
- 2021.11.27
지상의 작은 행복
이성선
낮은 지붕 위에 굵은 별들이
소나기로 쏟아지고
추녀 끝으로 그 무리가
안개꽃처럼 피어 나를 내려다 보는 밤
그 아래 누워 잠드는 것
이 하나로 지상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조금만 욕심을 더 부린다면
어린 시절 저녁 논둑에 쪼그려 앉아
논물에 내리비치는 집 그림자 바라보며
한정도 없이 가까이 내려 풀잎에 걸린
늦달의 외롭고 지겹던 시간들
무섭게 듣던 부엉이 울음 소리
다 되돌려 받아 살고 싶지만
나는 달 있는 곳으로 갈 사람.
벌레 우는 잡초 위에 삼경
하늘 아이가 심심해 낚시 드리우듯
내 마당 구석에 내려놓은 북두칠성을
내가 나를 꾀어 나가 바라보고 있는
이 하나만으로 나는 지상에서
마지막 행복한 사람이다.
- 저자
- 이성선
- 출판
- 지식을만드는지식
- 출판일
- 2014.06.30
흔적
이성선
꽃이 문을 열어주기 기다렸으나
끝까지 거절당하고
새로 반달이 산봉에 오르자 벌레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반만 먹고 그 부분에 눕다
달이 지고
서릿밤 하늘이 깊었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산이 혼자 그림자를 내려
꼬부리고 잠든 그의 등을 덮어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친 바람 한점 없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는 사라지고
그 자리 눈물 같은
이슬 두어 방울만 남아 있다
새와 풀꽃의 면회소
이성선
아버지는 비무장지대 너머에 계시다
강원도 고성 금강산 속
작은 마을
또는 원산에
아버지는 계시다
외금강과 해금강의 외로운 길 논둑의 풀대 끝이나 길가 가지 위에
구름 되어 머물고 비로 흐느끼고
이미 육신은 땅에 다 털어버린 후
바람으로 아들을 부른다
설악산 아래 찾아와 밤 지새다 떠난다
아홉 살 때 가신 아버지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며 가신 얼굴
그때부터 비무장지대는
남북을 가르는 띠가 아니다 아버지와 내가 찾아가 꽃으로 떠서
서로를 들여다보는 강물이 되었다
비무장지대는 지금
저승의 아버지와 이승의 아들이
만나 대화하는
새와 풀꽃의 면회소가 되었다
열렬했던 시인에의 꿈
-나의 데뷔시절-
이성선
나는 본래 대학 재학시절에 데뷔하고 싶었다. 모친의 완강한 반대로 문과에 못 가고, 글 쓰는 일과는 너무나 먼 학과에 입학한 나는 재학시절에 데뷔하면 그것으로 학교도 그만두고 어떻게든 그 방면으로 전력해 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1학년 때인 1961년 여름 처음으로 「현대 문학」에 투고하였는데, 그러나 될 듯하다가 안 되고, 홧김에 군대에 들어갔다. 학보병으로 제대한 후 다시 64년 「새」라는 작품을 들고 친 구의 주선으로 처음으로 목월 선생의 원효로 댁을 갔었는데, 선생께서는 또 그 작품의 내용이나 기교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나 남수 선생의 「새」를 너무 닮았다는(실은 그때 그런 작품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셨다. 억울함을 참을 길 없어, 그때 부터 시 쓰기를 그만두고 모친의 뜻에 따라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다 마음 고쳐 먹었다. 그 강렬한 시인에의 꿈도 버리고 졸업 후 바로 수원의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에 들어가 콩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7월을 근무하던 어느 가을날, 3일 밤을 꼬박 새며 고심한 나는 다시 그곳을 뛰쳐나와 무작정 고향으로 향했다. 시를 쓰겠다는 뜻 하나였다. 그때가 1967년이었다. 일 년여를 허송하다 신춘문예에 한번 낙방. 다시 서울과 시골을 떠돌며 써서 주소도 적지 않고 부친 시 한 편이, 그러나 70년 《중앙일보》 최종심까지 가서 3인 합심 과정에 두 작품이 양보 없이 겨루다가 끝내는 또 떨어진, 오늘 내게 시인이란 이름을 붙여준 「시인의 병풍」이다. 시구까지 인용해 가며 낙선을 안타까워한 미당 선생의 심사평.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시가 다시 지금은 없어지고 만 「문화비평」에 실리게 되었고 이어 당시 현대문학사에서 발행하던 「시문학』(지금은 문덕수 선생께 넘어간)에 첫 번째 시인으로 추천되는 영광을 가지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신문처럼 화려한 데뷔는 아니나 스스로 기뻤던 나는, 그러나 '문화비평」도 사라지고 「시문학』도 주소가 바뀐 지금 고향 잃은 사람처럼 가끔 쓸쓸해진다. (『월간문학. 1987. 7)
- 저자
- 이성선
- 출판
- 창작과비평사
- 출판일
- 2004.09.30
목숨의 배경
이성선
아직 노을은 파괴되지 않았다.
동트는 하늘빛은 바다 새벽
먼 곳에 깨어나
붉게 젖은 가슴 열고 나를 기다린다.
요람에서 떠오르는 노랫소리
살아 숨쉬는 목숨의 냄새
내 마음의 망가지지 않은 부분이 언제나
이 빛에 닿아 말한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돌아오면 해진 뒤
장엄한 뼈의 서산으로 돌아가
뜨거운 생명의 불을 놓는다.
새벽빛과 저녁빛 사이
노을과 노을 사이
내 마음의 온전한 집은
이를 배경으로 섰다.
내 두 날개가 여기 걸려있다.
영혼은 이 하늘에 슬프고 따뜻이 뜬다.
밤에 이곳은 아직
원시의 박쥐가 날고 이야기가 있고
잠들지 못하는 달이 내려가
지평의 마른 잎새에 귀를 묻는다.
바람이 짐승의 발자국을 만지고
허공에 찍힌 새 발자국마다 별이 새로
깨어난다.
저녁 산 능선이 고요히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오솔길처럼
걸려있다.
작은 마을이 개울물에 꿈을 묻고 자는 곳
하얀 박꽃이 마을 쪽으로 피는 곳
이곳에 나의 노을은 아직 파괴되지 않았다.
이성선 시인에 대하여
이성선 시인 소개 이성선은 1941년 1월 2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 256번지에서 이춘삼과 김월용 사이에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농에 속해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으나 1·4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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