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천양희 소개
천양희(千良姬, 1942년 1월 21일 ~ ) 부산광역시 출신.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정원 한때'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작품
시집
《마음의 수수밭》(창비, 1994)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수필집
2013년 《간절함 앞에서는 언제나 무릎을 꿇게 된다》
수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11년 만해문학상
천양희 시인의 시 11편 소개
마음의 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사람의 일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농담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 농사 풍성하던 그 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그믐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산(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 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끈
수평선이 되고 싶다
한 평의 바다도
못 가진 채
수초처럼 걸려
흔들리는 당신에게
허전하게 편하거나
편하게 허전한
수평선 하나 주고 싶어
우리가 껴안은
수많은 해안선
세상의 끈이 이렇게 길었구나.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https://youtu.be/6pbE5YYK3Vo?si=hYRUW9Jg3LBDawNC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밥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배경이 되다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
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
그가 말했다
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
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다
더이상 할말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
https://youtu.be/ZOdDKXoz6TU?si=PF09QIKAQJZnySY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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