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 소개와 시 소개
장석주 시인 소개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다.
1955년 1월 8일,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1975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심야>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존재와 초월> 입선하였다.
<고려원> 편집장과 <청하> 편집발행인을 역임하였다. 계간 ≪현대시세계≫와 계간 ≪현대예술비평≫을 펴내며 기획과 편집을 주관하였다.
2002년, 조선일보 이달의 책 선정위원을 역임하였다. 2007년, KBS ‘TV-책을 말하다’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와 동 대학원에서 소설창작과 소설이론을 강의하였다. 명지전문대와 경희사이버대학교에서 시 창작 연구와 문예편집론 등을 강의하였다. <국악방송>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현재는 전업 작가로 경기도 안성의 금광호숫가 ‘수졸재’에서 살고 있다.
시집
- ≪햇빛사냥≫(고려원, 1979)
- ≪완전주의자의 꿈≫(청하, 1981)
- ≪그리운 나라≫(평민사, 1984)
- ≪어둠에 비친다≫(청하, 1985)
-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나남, 1987)
- ≪어떤 길에 관한 기억≫(청하, 1989)
-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문학과 지성사, 1991)
-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문학과지성사, 1996)
-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세계사, 1998)
-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그림 같은 세상, 2002)
- ≪붉디붉은 호랑이≫(애지, 2005)
- ≪절벽≫(세계사, 2007)
- ≪몽해항로≫(민음사, 2010)
가을 법어(法語)
장석주
태풍 나비 지나간 뒤 쪽빛 하늘이다
푸새 것들 몸에 누른빛이 든다
여문 봉숭아씨방 터져 흩어지듯
뿔뿔이 나는 새떼를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이 삼킨다
대추열매에 붉은빛 돋고
울안 저녁 푸른빛 속에서
늙은 은행나무는 샛노란 황금비늘을 떨군다
쇠죽가마에 괸 가을비는
푸른빛 머금은 채 찰랑찰랑 투명한데
그 위에 가랑잎들 떠 있다
몸 뉘일 위도에
완연한 가을이구나
어두워진 뒤 오래 불 없이 앉아
앞산 쳐다보다가
달의 조도(照度)를 조금 더 올리고
풀벌레의 볼륨은 키운다
복사뼈 위 살가죽이 자꾸 마른다
가을이
저 몸의 안쪽으로 깊어지나 보다
가을 병(病)
장석주
아우는 하릴없이 핏발선 눈으로
거리를 떠돌았다. 아우는
몸 버리고 돌아와 구석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오, 아버지는 어둠 속에
헛기침 두어 개를 감추며 서 계셨다.
나는 저문 바다를 적막히 떠돌았다.
검은 파도는 섬 기슭을 울며 울며
휘돌아 사납게 흰 이빨을 세우고
물어뜯어도 물어뜯어도 절망은 단단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낡은 이 세상
가을 해 떨어져 저문 날의 바람 속으로
마른 들풀 한 잎이 지고 어둠이 오고
나는 얼굴 가득히 범람하는 속울음을 참았다.
살 부비며 살아온 정든 공기와
친밀했던 집 안팎 구석구석의 생김생김
아우와 누이와 아버지가
작은 불빛 몇 개로 떠올라
바람에 하염없이 쓸리는 것을 보았다.
오, 그때 세상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을 저문 바다 섬과 섬 사이
그 사이를 재우고 있는 것은
어둠과 바람과 파도뿐임을 알았다.
가을의 시
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 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겨울나무
장석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그믐
장석주
흑염소 떼가 풀을 뜯고 있다
어둑했다
젊은 이장이 흑염소 떼 데려가는 걸
깜박했나 보다
내 몸이 그믐이다
가득 찬 슬픔으로 캄캄하다
저기 먼 곳
그 먼 곳이 있으므로 캄캄한 밤에도
혼자 찬밥을 먹는다
길
내가 가지 못한 길을
한사코 마음만이 분주히 간다
내가 가는 길에 마음이 없고
마음 가는 길에 내가 없으니
저녁 답 가던 길을 버리고 말다
꽃에 바치는 시
마침내 뿌리가 닿은 곳은
메마른 흙이 가두고 있는
세상이 가장 어두운 시절이다.
흙 속에 길 찾지 못한 죽음들
흙 속에 주체할 수 없는 욕정들
흙 속에 죄 많은 혼령들
흙 속에 나쁜 욕망들
저렇게 많이 피어 있는 꽃들이
세상 가장 어두운 시절의
죽음들과 욕정들과 혼령들과 운명들을 품고
피어난 것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나비
장석주
나비는 날아간다.
나비는 햇빛 속을 떠간다.
나비는 무게를 채 갖지 못한 가벼운 넋이다.
나비는 모든 소리를 인멸하고 떠가는 한 점 정적이다.
세상이 시끄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힘들다고 하지 않는다.
나비는 날아간다.
최루탄 가스 자욱하게 피어 있는 거리를 지나
땅거미 내린 어둔 땅을 지나
누군가의 버려진 무덤을 지나
가뭄으로 말라버린 강을 지나
나비는 날아간다.
나비는 햇빛 속을 떠간다.
혼자 날아가지만
세상을 혼자 가는 것은 아니다.
지렁이랑, 개미랑, 게랑, 진흙뻘 속의 조개랑,
별과, 유령과, 바람과
함께 간다.
도무지 남을 해칠 줄 모르는 것,
세속의 아우성을 한 점 고요로 제압하는 것,
나비는 날아간다.
맹목의 겨울이 오기까지
나래를 펴고
나래를 찢겨
어느 산정에서 숨질 때까지
나비는 날아간다.
이승의 한 점 슬픔으로
나비는 햇빛 속을 떠간다.
냉이 꽃
장석주
여기 울밑에 냉이꽃 한 송이 피어 있다.
보라, 저 혼자
누구 도움도 없이 냉이 꽃 피어 있다!
영자, 춘자, 순분이, 기숙이 같은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계집애들 이름 같은,
촌스럽지만 부를수록 정다운
전라남도 벌교쯤에 사는 아들 둘 딸 셋 둔
우리 시골 이모 같은 꽃
냉이 꽃
어찌 저 혼자 필 수 있었을까.
한 송이 냉이꽃이 피어나는 데도
움트는 씨앗의 꿈틀거리는 고단한 생명 운동과
찬이슬,
땅 위를 날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몇 날의 야밤과
피어도 좋다는 神의 응락,
줄기와 녹색 이파리를 매달고 키워준 햇볕과
우주적 찰나가 필요하다.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 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의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당신을 만나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단감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 만 봄이 머물고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장석주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
석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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