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친구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초여름 숲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 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소식
오늘도 세상에 기쁜 일은 많다
어느 집에는 아기가 태어나고
누구네 꽃밭에는
간신히 실눈 뜨고 꽃도 피었다
시간이 이글거리는 창가에서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새로 사랑을 시작하고
새벽녘에 마른번개가
잠시 쳤던 것은
밤새 고통하던 시인이
드디어 그의 새 시편에
뚝! 하고
찍는 소리였다
오늘도 이렇게 기쁜 일은 참 많다
천길 낭떠러지
짐승들 우글거리는
이곳에서도
늙은 꽃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전보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창백한 달이 떠 있는
신새벽이어도 좋으리라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의 놀이처럼
싱거운 화면, 그 위에 꽂히는
한 장의 햇살이고 싶다
사랑이라든가
심지어 깊은 슬픔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흐름에 대하여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고 싶다.
참으로 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흐름의 숨결로 키워낸 진주는
왜 슬픔처럼 영롱한 것인지
알고 싶다.
하늘은 왜 우리에게
햇살과 함께
자유를 주었는가.
우리들은 왜 흐르는가.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지 못하고
날개가 되지 못하고
왜 약속처럼 산으로 가는가
산으로 가는가.
한 벌 죽음으로 자유와 햇살 빼앗기고
다만 혼자 제 목숨 갖고 가는가
고독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나를 낳은 달
나를 낳은 건 흙이나 학교가 아니었다
떠나가라 떠나가라 소리치며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달, 그녀의
깊은 주름살을 오늘은 어머니라 부른다
맨드라미 같은 붉은 벼슬의 꿈과
날마다 알을 낳는 힘과
밤마다 사랑을 만드는 눈물을
그녀가 아니면 어디에서 배웠으랴
모든 생명을 온기로 품어
살아있는 대지의 체온
모든 상처를 맑게 씻어
결국은 빛나는 생명의 눈부심을
나를 낳은 달, 그녀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으랴
지난여름 매미채 하나씩 들고
도회로 떠난 아이들은
고향에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거인이 되었다지만
그래서 기쁘고 쓸쓸한
나를 낳은 달
가을 창가에 홀로 핀 꽃처럼
환환 웃음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에 관한 시 5편 (7) | 2025.08.11 |
---|---|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6) | 2025.08.09 |
시 한 편 "상 처" - 박두순 (2) | 2025.07.23 |
유 하시인 소개와 시 18편 소개 (12) | 2025.07.10 |
시를 왜 읽어야 할까? (2) | 2025.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