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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의 시 - 2

김혜순  시인의 시 - 2

 

 

 

잠언 선생님

 

 

잠언 선생님 1이1 나타났다 모두 열광했다.

잠언 선생님 2가2 나타났다 모두 열광했다.

잠언 선생님 3이3 나타났다 모두 열광했다

 

잠언 선생님들은 단상에 올라가 잠언 잠언 잠언 했다.

출마하건 출마하지 않건 잠언 잠언 했다.

 

잠언 선생님들 잠언 지으시느라 일은 언제 하실까.

 

심지어 개그맨들도 잠언 잠언 잠언 했다.

가수들도 잠언 잠언 했다.

 

밥 먹을 땐 이렇게

잠잘 땐 이렇게

사랑할 땐 이렇게

생각할 땐 이렇게

직업을 잃었을 땐 이렇게

돈 한 푼 없을 땐 이렇게

 

않아는 잠언 선생님들이 내지르는 교훈에 질렸다.

네온사인처럼 태우지도 못하는 싸늘한 불빛에 질렸다.

 

이를테면 지독하게 아픈 사람에게 잠언 선생님이 말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아프면 죽는다)

아프니까 너다(아픔을 참으면 죽는다)

실컷 아프거라(결국 죽는다)

 

잠언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일은 안 하고 일 주변에서 모두 잠언 했다..

작업복을 입고 잠언 하러 가는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이 좋아하는 잠언.

 

이웃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

개그 프로에 나와 사람들을 실컷 웃겼다.

오락 프로에선 자질구레한 일에 목숨이라도 바칠 듯 열광했다.

영화감독 겸 배우가 되어선 영화 속에서 총질을 마구 해댔다.

선량하건 무고하건 마구 죽여버렸다.

그의 방은 사람을 죽이는 소리와 불꽃으로 환하게 명멸했다.

그는 잠언을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죽음의 병상을 둘러싼 사람들이

죽어가는 자를 향해

잠언 잠언 잠언 하는 광경!

빛을 향해 가! 똑바로 가! 돌아오지 마! 하는 광경!

 

-김혜순, <않아는"잠언 선생님"-

 

 

 

 

별을 굽다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 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 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 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 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풍경의 눈빛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니다

내가 성의 계단을 오를 때

내 시선의 높이가 변하면서 풍경이 다르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줄곧 풍경이 눈빛을 바꿔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나에게 성을 안내해 주겠다고 내 팔목을 잡아끌며

계단을 오르던 소녀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낮잠 자다 깨어나니 수억만 남자들이

둘러싸고 한꺼번에 내려다보는 듯

우리는 갑자기 통해서 자지러지게 소리쳤습니다

 

소녀는 놋쇠 거푸집 하나에 꼭 들어맞을 만한 작은 종처럼

세차게 울다가 소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곤 여섯 방향에서 달겨드는 풍경의 화살에 갇혀

더러운 손톱을 빨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안내해 주었으니 돈을 달라고 조르던 것도 잊은 채

유충처럼 제 고치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지옥이

성의 발코니 아래로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모두 거짓말이야 하고 바람이

광대하고 광대한 거짓말인 풍경 속을 날아갔습니다

새들이 내 뺨을 후려치듯 떨어지며 낮은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계단마다 바뀌는 풍경의 눈빛이

위아래 사방에서 떨어지는 휘몰아치는 본드처럼

내 전신을 휘감았습니다

 

 

 

지평선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레이스 짜는 여자 

 

 

송편을 찌다가

떡 반죽을 두 손으로 마구

짓뭉개고

침을 탁 뱉고

마구 내던지고 싶다가도

쟁반 위엔

형형색색의 가지런한 송편

 

술을 따르다가

술잔을 내던지고

깨뜨리고

깨어진 술병을 들고

마구 찌르고, 뚝뚝 듣는

선혈을 보고 싶다가도

약간 떨며 술잔 모서리에

찰랑 알맞게

 

언제나 고요한 시선, 고요한 수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한숨 한 번 쉬고

 

불을 지피다가

불붙은 장작을

초가삼간 지붕 위로 내던지며

나와라 이 도둑놈들아

옷고름을 갈가리 찢고

두 폭 치마 벗어던지며

용천 발광하고 싶다가

 

문풍지가 한 밤 내 바르르 떨고

하이얀 식탁보는 눈처럼 짜여지고

 

 

김혜순 시인의 시

 

 

 

 

 

 

 

엄마 / 김혜순


나는 엄마다

딸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내가 또 새끼를 근엄하게 훈계하고

먹여서 기르니

나는 엄마다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엄마 행세를 한다

그건 안 돼!

하지 마!

때릴 거야!

 

그전엔 난 엄마가 아니었다

어렴풋한 기억 저편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두 눈이 전우주를 향해 열려 있고

손가락들이 명왕성 해왕성을 꼬집고 놀 때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나의 엄마도 나에게 엄마 행세를 했다

별 떨어질라 푸르른 창공 아래엔

지붕을 덮고

바람 불라 넓은 벌판 한가운데

벽을 세우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시야를 좁게 가져라

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

영혼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

널 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

우물을 파는

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었다

 

 

우주엄마와 우리 엄마

 

 

   우주는 무안하나 그 속엔 낙이 없구나(누군가의 명언)

      이 알 속에는 나만 있구나 (어느 달걀 노른 자의 명언)

 

엄마는 물 마시고 싶고

우주엄마는 물 만져보고 싶고

 

엄마는 창밖의 푸른 하늘로 다이빙하고 싶고

우주엄마는 검은 채널 돌려 우리엄마 시청하고 싶고

 

엄마는 마지막 예금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고 싶고

우주엄마는 검은 우물 속에서 벗어나고 싶고

 

엄마는 병원에서 집에 가는 게 소원

우주엄마는 엄마를 우주로 데려가는 게 소원

 

엄마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고

우주엄마는 점점 다가오고

 

우주엄마가 다가올수록 우리엄마는 아프고

엄마는 이제 그만 아프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고

 

머나먼 우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별 중에 어디서

내가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엄마는 나한테 그런 소리나 하고

우주엄마는 우리엄마의 몸을 깨뜨려 별들이 무한하게

 

엄마의 알을 깨고 거기 우리엄마 대신 노른자처럼 눕고 싶은

머나먼 우주의 검은 엄마는 딸아 딸아 내 이쁜 딸아 나를 부르고

 

 

딸을 낳던 날의 기억 -판소리 사설조로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다시 들어가니

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

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

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

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

바람을 넣고

내 배는 풍선보다

더 커져서 바다 위로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리워 다니고

거울 속은 넓고 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

번개가 가끔 내 몸속을 지나가고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

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

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

청천벽력.

정전. 암흑천지.

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

흰 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 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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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소개와 시 10편 소개

김혜순 시인 소개와 시 10편 소개 김혜순(金惠順, 1955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79년 시단에 등단했다. 1988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에 임용되었다. 2019년 6월 6일(현지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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