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기 시인 : 영천능금농사 70년사
몸이야 살수록 낡아가지만 세월은 묵어서 발랄해진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이었다
늙은 능금나무 그늘이 외딴집 뒤쪽 귀퉁이부터 허물어 내던 그날 오후,
늙은이는 응급차에 실려 서쪽 병원으로 갔다
열다섯부터였으리라
능금농사 70년을 창밖으로 내다보는 난간 없는 생,
초점 잃은 눈에도 강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능금밭이 보였으리라
능금이 초록에서 막 붉은빛으로 옮아가는 때,
앳된 간호사가 와서 혈압 재는 동안
능금나무 갈아 심듯 생도 재개발이 가능하겠다 싶은 생각이 주름 깊은 이마에 스친 것 같기도 했다
간병인이 와서 기저귀 갈아주는 사이에도
눈은 한사코 능금밭 쪽으로 열려 있었다
산소호흡기로는 젊은 날 데려올 수 없는 고목,
산소용접기라면 한 시절 다시 세워볼 수도 있겠다만
호흡기만 떼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저 낡은 몸엔
영천능금농사 70년이 내장되어 있다
시월 영천금이 그 본색 드러내기 전에
능금나무그늘이 이마에 닿으면 마침내 눈감을
저 늙은이 죽어서도 아삭아삭 능금, 씹을 것이다
-이중기, <사이펀문학상 수상시집, (작가마을, 2022년)> 중 "영천능금농사 7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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