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선 시인 : 하늘 문을 두드리며

1
문을 두드립니다. 한밤 조용히 문을 두드립니다. 두려움에 오슬오슬 떨고 있는 나의 문빗장이 벗겨집니다. 문이 열립니다. 문 밖 어두운 밤 하늘이 눈빛을 번뜩이며 한 그림자가 다가섭니다. 외투 벗어 하늘에 걸어 두시고 나를 열고 내리십니다. 그분이 밟고 오신 물소리가 밤 하늘에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허공은 향기로 가득합니다. 갑자기 가지에 선율이 빛나고 밤의 살빛이 비늘을 번뜩이며 나를 감쌉니다. 알 수 없는 비밀이 내 몸 속에 스밉니다.
그분은 내리셨습니다. 형체도 없이 내리셨습니다. 무섭도록 헐벗은 나를 깨워주시고 비로소 이 영혼을 눈뜨게 하십니다.
44
하늘을 향해 빙그레 웃습니다. 하늘도 나를 향해 빙그레 웃습니다. 오직 하늘을 따르니 하늘의 기쁨이 내 안에 가득합니다.
빗소리로 집을 짓고 별빛으로 이영을 덮습니다. 하늘이 다시 빙그레 웃습니다. 하늘이 웃어주니 그 향기가 내 집안에 가득합니다.
57
아침이 이 마음을 열고 저녁이 이 마음을 닫습니다. 태어남이 이 마음을 열고 허공에 새 날아감이 이 마음을 흔듭니다.
마음은 없는데 여닫음은 무엇이며 흔들림은 또 어디에서 와 어디에 서 있는 것이옵니까? 이 영혼에 건너오시어 우주를 열어 주신 이여. 내 마음 안 모든 것 걷어 가시어 나를 비워 주소서. 빈 마음 자유롭게 부리도록 비워 주소서 하여 허공에 집 짓고 오가는 바람, 해와 달, 가지의 대화나 하늘의 눈짓 같은 부질없는 똥으로나 채우게 하소서. 감추고 드러남의 분별이 없는 완벽한 세계를 주소서.
80
가난함이여. 가난함의 기쁨이여. 가난함의 그 천진난만함이 내 안에서 울음을 터뜨릴 때 광풍보다 더 순수해지는 내 영혼이여. 내 영혼이 지금 맑고 맑아 샘물처럼 가난하여 그 울림이 투명하니 하늘도 우주도 모두 나를 시중들고 있읍니다.
95
하늘을 쳐다보면 거기 순수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고드름 향기 그윽한 사이 푸른 눈빛 열고 그분은 내 영혼을 살피고 계십니다.
한 마리 새가 숲에서 날아갑니다. 새가 날아간 빈 자리 은밀히 파문지며 가지와 가지 새로 트인 길, 비밀의 길. 그 길을 따라 흐르는 개울물. 가지 끝에서 가지 끝으로 하얀 개울물이 걸려 흐릅니다. 이 물의 오솔길로 무궁한 음악이 흘러내립니다.
침묵을 깨치는 하늘의 오솔길은 내 가슴 안으로 흘러들고 그 물소리가 나 안에서 별빛을 튕기며 번뜩입니다. 내 육체 구석구석 흘러들어 부서지는 풀빛. 내 영혼을 침묵의 향기로 감싸는 물빛 선율.

이 시집 전체는 절대자로 지칭되고 있는 ‘그분’에 대한 경건한 노래나 기도, ‘그분’과의 대화, 그리고 선문답의 형식이 주를 이룬다. 마지막 연인 101연에 이르기까지 각 연의 길이는 대부분 200자 원고지 2장 분량이며, 자연계의 계절적 변화와 그에 따른 시적 리듬을 가미하고 있다.
시집의 주요 내용은 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비상하는 과정을 통해 절대자에게 다가가려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제목인 ‘하늘문(門)을 두드리며’에 그런 간절함이 잘 투영되어 있다. 이 시집에서 절대자는 불교적 성격도 있긴 하지만, ‘미(美)의 신(神)’을 더 강하게 의미한다. 즉 절대자는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해낸 아름다운 존재에 가깝다. 연이 진행될수록 절대자에 대한 찬미가 고조되고 있으며, 94연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절대자를 드러내기 위해 밤, 새벽, 해, 고요, 목련, 달빛, 별, 비, 악기, 우물 등과 같은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영묘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시인의 고향이며 거주지였던 ‘동해(東海)’와 ‘설악(雪嶽)’은 이런 발상을 가능하게 한 장소로서 의미 있는 곳이다.
이 시집은 철학적, 명상적, 정신적, 형이상적 성향이 강하면서도, 그 소재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없이는 불가능한 착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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