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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시

고향

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조말선,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문학과지성사, 2012)> 중 "고향"

 

 

 

 

 

 

 

 

 

 

노래

이성부 ​


고향에 내려 바람에 눈 씻고 보면

고향 사람들의 얼굴

대낮에도 웬 그림자에 가려 있다.
뜨거운 마음을
낯익은 이의 손에 겹치면

힘없이 빠지는 손,

감추는 손.

다시 보는 고향 흙 맨발로 밟아도

고향의 다순 살결은 끝내 아니다.
벌거숭이로 몸 비비던,

다 닳아진 신발에도 와 닿던,

눈물나는 그 흙이 아니다.
겁에 질려 움츠린 大地,

숨어버린 땅.

달이 없고 말이 없어 沈默까지도 없다.
고향은 이제 안부를 묻지 않는다.
어떻게 되었느냐를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아 아무것도…… ​


- 이성부,『百濟行』(창작과비평사, 1977)

 

 

 

 

이성부 시인

 

 

 

 

 

 

 

 

고향

-고사목

 

황학주 

송아지를 팔고 가는 눈길이 있었다

눈 녹은 물 속에

작은 식물 같은 그늘이 있고

울먹임이 길에 고여 흘러내렸다 ​


담쟁이넝쿨에 기댄 담벼락이 있었다

멀리 노을 사이로

한 눈송이가 한 눈송이를 안고 있다가

담벼락에 와 부딪쳤다 ​


그냥, 넘어진 자가 있었다

멍이 든 채 담벼락 밑에

눈 녹은 물이 고였고

오래된 그늘이 제 속을 비추었다 ​


슬레이트 지붕 밑엔

세숫대야에 더운물을 타 발을 씻기는

낡고 늙은 당신이 있었다

울먹임이 나이테처럼 간간이 넘쳤다 ​


- 황학주,『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 2014) ​

 

 

 

 

 

 

 

 

귀가 서럽다

이대흠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어머니의 속을 절인 것 아닌가


-이대흠, <귀가 서럽다,(창비,2014)> 중 "젓갈"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박용래, '일띿산에 개구리 울음 / 시인생각, 2013

 

 

 

 

내 고향

김억

 

내 고향은 곽산의 황포가외다

봄노래 실은 배엔 물결이 놀고

뒷산이란 접동 꽃 따며 놀았소.


천리 길도 꿈속엔 四.五십리라

오가는 길 평양은 들려 놀던 곳

어제 밤도 가다가 또 못 갔쇠다.
야속타 헤매는 맘 낸들 어이랴

 

지는 꽃은 오늘도 하늘을 날 제.
아지랑이 봄날을 종달새 우네.
육로천리 길 멀다 둘 곳 없는 밤

이날도 고향 찾아 떠나는 것을.

 

 

 

 

고향

나태주 ​


고향집 뜨락에서 옮겨온

붓꽃이 피었다

고향집 뜨락에도 바닷물 빛

수줍은 소녀의 봄이 피었겠다 ​


고향마을 뒷산에서 캐온

상사초가 피었다

고향마을 뒷산에도 연분홍 빛

어여쁜 신부의 여름이 왔겠다.

- 나태주,『틀렸다』(도서출판 지혜, 2017)

 

 

 

 





고향에서

신달자

 

 

땅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 어릴 적 살던 집

유독 앞마당이 푹 꺼진

그 자리에

어머니 긴긴 한숨

아직 선명히 울리고 있었다 ​

 

가을 무 널어 말리는

햇살 모이는 마당

꼬드득 꼬드득

어머니 애 말리던 곳

달빛은 속없이 휘영청

쏟아져 내리는 날

죄 없이도 그날

마당 한쪽이 무시로 푹 꺼지던 날 ​


- 신달자,『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문학수첩, 2001) ​

 

 

 

 

 




마음의 고향 1 

 ㅡ 白夜

 

이시영



키가 훌러덩 크고 웃을 때면 양볼에 깊이 보조개가 패이는

작은집 형수가 나는 좋았다

시집온 지 며칠도 안돼 웃냇가 밭에 나왔다가

하교길 수박서리하다 붙들린 우리 패거리 중에서 나를 찾아내

"데름, 그러믄 안 되는 것이라우" 할 때에도

수줍은 듯 불 밝힌 두 볼에 피어나던 보조개꽃 무늬

아, 웃냇가 웃냇가
방아다리 지나 쑥대풀 우거지고 미루나무숲 바람에 춤추는 곳

사래 긴 밭에 수많은 형수들이 엎드려

하루종일 밭고랑 너머로 남쪽나라 십자성 부르는 곳

저녁에 소몰이꾼 우리들이 멱감는 냇가로 호미 씻으러 내려와서는

"데름, 너무 짚은 곳에는 들어가지 마씨요 이" 할 적에도

왈칵 풍기는 형수의 땀냄새가 나는 좋았다

홀시아버지 밑 형제 많은 집으로 시집와 남정네마저 전쟁터에 보내놓고

새벽논에 물대기 식전밭에 고추따기 아침볕에 보리널기 쏘내기 밭에서

소고삐 몰아쥐고 송아지 찾기로 여름 내내 등적삼에 벼이슬 걷힐 날 없으면서도

저녁이면 선선한 모깃불을 피워놓고 콩국수 말아

와상 가득 흥겨운 집안 잔치를 벌일 줄도 알았던 형수,

모깃불 매캐하게 사위어가고 하나둘 어린 형제들 잠들어 갈 무렵이면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데름, 데름은 꼭 우리 집안의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쓰우."
"훌륭한 사람이 워떤 사람인디라우?"
"장군 같은 것, 그 뭣이라더라 밥풀 여럿 단 쏘위 같은 것……"
그러면 마당 한구석에서 다가온 어둠이 빤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내 눈에

갑자기 별빛 한 무더기가 쏟아져내렸다

환한 밤이었다

- 이시영,『무늬』(문학과지성사, 1994) ​

 

 

 

고향에 대한 시 10편



​고향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나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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