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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관한 시

산에 관한 시 7편

 

-정희성

-함민복

-박혜성

-나희덕

-이성선

-이성부

-고재종

 

 

 

 

 

 

 

산에 관한 시 7편

 

 

산 

정희성 ​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


- 정희성,『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



함민복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 1996) ​

 


 

 

 

 

 


 

겨울, 설산에 들다

박혜성

 

 

잠든 척 모로 누운 근육질의 강골 사내

한 때 잉걸불이던 제 속내 다스리는지

하얗게 길을 지운다, 세속으로 이어지는

 

낮달 한 잎 물고 간 새 숨어든 구름 이고

시리게 언 뼈마디 짐승처럼 우는 나목裸木

살아 온 시간만큼이나 가지 친 시름에 겨워

 

왜 산을 오르는가, 허허실실 되묻는다

숫눈이 환할수록 눈 뜨고도 허방 짚어

느낌표 혹은 쉼표로 세상 다시 가늠할 때

 

함박눈이 2막 3장 합창처럼 쏟아진다

환청의 골이 깊은 이 황홀한 아수라도

정녕코 길을 잃었나, 아님 나를 잃은 걸까?

 

걸음 멈춰 돌아보면 움푹 팬 눈의 생살

놀뛰는 정맥인 듯 꿈틀, 길 하나 낳고

누군가 그 통점 따라 생을 반쯤 오른다

 

 

 

 

 

 

 


산속에서

나희덕 ​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
막무가내의 어둠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


- 나희덕, 『그 말이 입을 물들였다』(창작과비평사, 1994) ​






내 안에 산이 

이성선 ​

 


산을 가다가 물을 마시려고 샘물 앞에 엎드리니 물 속에 능선 하나 나뭇가지처럼 빠져 있다 ​
물 마시고 일어서자 능선은 물 속에도 하늘에도 없다 집에 돌아와 자는데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들여다보니
내장까지 흘러들어간 능선에서 막 달이 솟는 소리 그때부터다
내 골짜기 새 울고 천둥치고 소나무 위 번개 자고 밤에 짐승 걷고 노루귀꽃 고개 들어 가랑잎 안에 해가 뜬다 내 안에 산이 걸어간다 ​

 


- 이성선,『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세계사, 2000) ​

 

 

 

 



안 가본 산 

이성부 ​

 


내 책장에 꽂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

 


- 이성부,『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



산에 다녀왔다

고재종 ​

 


유난히 연둣빛이 번지는 산에 다녀왔다 오늘 또 한 생을 묻고 돌아온 산엔 파닥이는 바람 소리 아플 때까지 산벚꽃 펄펄 날렸다 ​
집 없으면 거지요 걸릴 것 없으면 스님이라던가 집도 절도 없이 寒酸한 마음의 한산은 날리는 산벚꽃 낱낱으로 반짝거렸다

수십여 년 길을 물었으니 너럭바위에 꽃 피고 지길 몇 번이던가 누구나 항복하기 전에 이미 연둣빛에 들키고 지는 꽃잎에 잡히지만 ​
서럽고 애달픈 어머니 울음 같은 것들의 내력을 건너 꽃으로도 꽃 피지 않고 잎으로도 잎 지지 않을 일의 도모이거니

유난히 연둣빛이 한창인 산에 다녀왔다 한 길을 묵묵히 보내고 또 한 생을 받고 돌아오는 일은 늘 외롭고 장엄한 일이었다 ​

 


- 고재종,『꽃의 권력』 (문학수첩,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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