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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관한 시 10편

 

물에 관한 시 7편

-함민복

-마종기

-하청호

-장일순

-도종환

-임보

-이건청

 

 

 

 

 

물에 관한 시 7편

 

함민복 ​

 

 


소박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
몸 낮추어 ​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

 


- 함민복,『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

 

 

 

 

 



물빛

마종기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혀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마중물과 마중불

하청호

 


외갓집 낡은 펌프는

마중물을 넣어야 물이 나온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땅 속 깊은 곳

물을 이끌어 올려주는 거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도

마중불이 있어야 한다.
한 개비 성냥불이 마중불이 되어

나무 속 단단히 쟁여져 있는

불을 지피는 거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이끌어 올려주는 마중물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지펴주는 마중불이 되고 싶다.


(하청호·아동문학가)

 

 

 

 

 

 

맹물

장일순



하긴 물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좋은 물은 무미(無味)한 맹물이지요.
아무 맛도 없는 게 맹물이지.
맹물은 날마다 먹어도 괜찮습니다.
꿀물은 달지만 그렇게 마실 수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가끔 먹는 것을 귀하다 하고

매일 먹는 것은 별

로 귀한 줄 모르거든요.

 

 

 

멀리 가는 물 ​

도종환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물의 세상 ​

임보

 


남해 거문도쯤에서

한 40분만 바다로 달려나가 보면

이 세상은 뭍이 아니라

물[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상의 7할이 물로 뒤덮여 있고

바다의 깊이가 산들의 높이보다 더하니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지구가 아니라 수구(水球),

하나의 큰 물방울―푸른 수국(水國)이다.
거친 바다의 물결을 가르며

날듯이 헤엄쳐 가는 저 상어의 무리들을 보라

엔진도 프로펠러도 달지 않았지만

그들은 얼마나 눈부시게 비상하는가

물나라의 왕자들

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다.
뭍에 붙어사는 생명들은 한갓 더부살이일 뿐

지상에 군림하는 간악한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강자라고?
물 속의 세상에선 단 몇 분도 맨몸으로 버티지 못하는

나약한 무리들일 뿐

너희는 이 세상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불량배에 지나지 않을 뿐

이 세상의 주인은 비늘 번득이는 어족(魚族)들

이 세상의 황제는 수궁(水宮)에 있다.



 

 

이건청

설악산 백담사를 스쳐 내려온 물이 용대리 쯤에 기진해 있다. 물은 얼어버렸고 얼어붙은 얼음장 밑으로만 조금씩 겨우 겨우 흐른다. 처음 산골짝을 타고내릴 때 물은 그냥 흘러 가랑잎도 몇 잎 띠우고 흘러 소양강에 닿고 싶었겠지, 내린천 붉은 단풍도 되고 싶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기진해서 얼었구나, 목소리도 잠겼구나, 얼음장 금가는 소리로 한 밤, 기침까지 하는구나.

늦가을까지도 백담에 빠지는 별들을 모두 건져 담고 오느라고 길은 멀어지고, 일찍 겨울이 왔구나, 이 겨울, 엄동의 물은 무겁고, 밤은 너무 깊어져 버렸는데 얼음장을 맨발로 딛고 오는 구나. 얼어붙은 밤길을 걸어 애비에게 돌아오는 딸아.

- 이건청,『굴참나무 숲에서』(서정시학,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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