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관한 시 10편
비
김남주
어떤 비는 난데없이 왔다가
겨울 속의 꿈을 앗아가지만
봄비는 나물 캐는 소녀의 까칠한
손등을 보드랍게 적시지 않는다
어떤 비는 폭군처럼 왔다가
들판을 마구 휩쓸어 가지만
여름비는 두레질하는 종부의 금 간
논바닥을 다물게 하지 않는다
어떤 비는 살며시 왔다가
채전을 촉촉이 적시어 주지만
가을비는 김장하는 아낙네의 벌어진
손바닥을 아물게 하지 않는다
어떤 비는 당돌하게 왔다가
젊은 날의 언덕을 망가뜨려 놓지만
비의 계절에 미쳐버린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지 않는다
봄비
박목월
조용히 젖어드는
초가지붕 아래서
온종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 삼십 리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마을이라
봄비는 와서
젖은 담 모퉁이
곱게 돌아서
모란 움 솟으랴
슬픈 꿈처럼
https://youtu.be/ziF94ipMico?si=Lh-7lDGuT3fC0UIv
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가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서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봄비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봄비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 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봄비 그친 뒤
남호섭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 안개다
산 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https://youtu.be/sR_hpOazf6Q?si=PbKrhIEraqy8b8ex
가랑비
정완영
텃밭에 가랑비가 가랑가랑 내립니다
빗속에 실파가 가랑가랑 자랍니다
가랑파 가꾸는 울 엄마 손 가랑가랑 젖습니다
그렇게 속삭이다가
이성복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소리 새어 나올 때까지
https://youtu.be/FKRwxJRl0S4?si=-EhO43npvsteW4K8
https://youtu.be/wl7hJr6kwto?si=8buW8UqQnNr-48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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