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 10편
익어가는 가을
이해인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당 신
김용택
작은 찻잔을 떠돌던
노오란 산국(山菊)향이
아직도 목젖을 간질입니다.
마당 끝을 적시던
호수의 잔 물결이 붉게 물들어
그대 마음 가장자리를 살짝 건드렸지요.
지금도 식지 않은 꽃향이
가슴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모르겠어요.
온몸에서 번지는 이 향(香)이
山菊내음인지
당신 내음인지...
나, 다 젖습니다.
들국화
천상병
산등선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 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산국(山菊)
이정록
들국화 꽃망울은 슬하 어린것들이다
못자리 골, 숟가락, 많은 집이다
알루미늄 숟가락으로 퍼먹던
원기소 알약이다 마른 들국화 송아리는
해마다 산모가 되는 양순이다
반쯤 실성했던 머리칼을 하고서
연년생의 뿌리에게 독기를 내리고 있다
시든 꽃망울 속에 코를 박으면
죽어 묻히지 못한 것들의
살내음이 득시글거린다
소도 핥지 않는 독한 꽃
이곳에 누우면 내가 양순이다
소도 사람도 원기소 알약으로 작아진다
슬하 어린것들의 삭은 이빨에
광목실을 묶는, 늦가을, 서릿발이다
가을 엽서
안도현
한잎 두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람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들국화
나태주
바람 부는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생각 말자고,
아주 아주 생각 말자고.
갈꽃 핀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잊었노라고,
아주 아주 잊었노라고.
구름이 헤적이는
하늘을 보며
어느 사이
두 눈에 고이는 눈물.
꽃잎에 젖는 이슬.
가을 사랑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들국화
곽재구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으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코스모스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집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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