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시들
12월 저녁의 편지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12월의 시
강은교
잔별 서넛 데리고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처마끝마다 매달린
천근의 어둠을 보라
오둠이 길을 무너뜨린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일년의 그림자도 지워버리고
그림자 슬피 우는 마을마저 덮어버린다
거기엔
아직 어린 새벽이 있으리라
어둠의 딸인 새벽과
그것의 젊은 어머니인
아침이
거기엔
아직 눈매 날카로운
한때의 바람도 있으리라
얼음 서걱이는 가슴 깊이
감춰둔 깃폭을 수없이 펼치고 있는
떠날 때를 기다려
달빛 푸른 옷을 갈아 입으려
맨몸들 부딪고 있으리라
그대의 두 손을 펴라
싸움은 끝났으니, 이제 그대의 핏발선 눈
어둠에 누워 보이지 않으니
흐르는 강물소리로
어둠의 노래로
그대의 귀를 적시라
마지막 촛불을 켜듯
잔별 서넛 밝히며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그림자를 거두며 가고있다
12월의 독백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ㄲㄱ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둘러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12월의 엽서
이해인
또 한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 텐데...
이런 행복가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12월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엠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12월이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천상병
엘리어트란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는다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새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은
새해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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