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령 - 이별
유안진
동동 발 굴러도
올 때는 오고야 만다
떠남으로 그리움이 되고
고향이 되는 이치 앞에
헤어져야 애인이 되는
어이없는 이 엇갈림이여
11월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11월
배한봉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11월
박용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1월의 비가
도혜숙
길이
어둠을 점화한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바다는 별을 쏘아 올리고
바람,
네가 피워대는 슬픔의 무량함으로
온 산이 머리끝까지
붉게 흔들린다.
11월
황인숙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11월의 나무처럼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의 나무
김경숙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11월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
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11월의 시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를 한 겹씩
마음을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도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11월의 나무들
정연복
세 계절 동안
무성했던 잎새들
아낌없이 내려놓고
알몸의 기둥으로 우뚝 서는
11월의 나무들은
얼마나 의연한 모습인가
비움으로써 결연히
맞설 태세인 나무들을
겨울 칼바람도
어찌하지는 못하리.
저 나무들이 있어
오고야 말리
겨울 너머 꽃 피는 봄
기어코 오고야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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