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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인 시 9편

진은영 시인 시 9편

 

 

지은영 시인의 시 8편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가족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긴 손가락의 시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

.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

의 잎들이 피어난다.

 

 

 

물속에서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 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고백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 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로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대신 구불구불한 동물 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수음처럼 할 말이

 

나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음 묘비들

나대신 울고 있는 한 여자에 대하여

 

 

 

 

훔쳐가는 노래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 주지,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 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 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 주지,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진은영 시인 소개

진은영 시인 소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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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오래된 비밀 하나 말해줄까, 나는 사포였다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나의 뮤즈, 내 자매들을 신에 게 헌납했다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다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나는 잿빛 고수머리, 칼날을 쥔 유디트였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든 용기의 목을 잘라 삶에게 가

져갔다

그래도 희망은 여인 곁에 누워 있다

이 빠진 노파의 쭈그러든 젖을 빨며 울다 잠든 아기

처럼

 

나는 햄릿이 사랑한 요릭

다시 태어나려고 익살을 전부 팔았다

질문은 핵심을 비껴간다, 안와에서 빠져나간 눈알처럼 껍질을 부수지 않고 노른자를 맛보려는 왕들은 어찌 가르쳐야 하나요

죽음의 간을 맞추려고 마지막 풍자까지 써버렸는데

 

나는 해운사에 취직한 이스마엘

배를 탔다, 하늘은 붉고 시간은 흰 돛과 함께 물 밑으로 사라졌다

나의 하느님, 전당포에 앉아 계신 인색한 하느님

얼마나 값을 쳐주시려고

이 많은 영혼을 당신 속주머니에 챙겨 넣으셨나요?

겨우 고관대작을 위한 은그릇 몇 개 내주실 작정이면서

 

올랜도, 나 올랜도는 모든 사람을 상실한 후에 태어 났다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나 자신의 현존

모든 상실을 보기 위한 두 눈과

본 것을 말해야 할 작고 흰 입술을 가지고서

 

올랜도, 우리가 모든 슬픔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시 속에 나오는 이름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찾아보았어요.***

*올랜도 : 기사 - 명예와 용기 상징

*사포 :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주로 사랑과 감정을 노래한 시인

*유디티 : 찬양받는 여자

*요릭 : 궁정 광대(햄릿 : 한때 살아있고 웃음을 주던 존재, 지금은 사라진 존재)

*이스마엘 :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의 아들, 광야로 떠나게 된 존재, 그러나 죽지않고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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