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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 노래 '나는 세상 모르게 살았노라'는 김소월 시인의 시

 

송골매의 배철수 노래 '나는 세상모르게 살았노라'는 김소월 시인의 시이다.

 

 

 

 

 

김소월 시인 시 소개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란 길이 이어 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을 김 매이는

 

 

 

송골매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귀로 들었노라

 

만수산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배철수

 

 

 

 

 

https://youtu.be/j2HwsO-BQtc?si=Zz4d4f0IoaUCj4Db

 

 

 

 

 

 

김소월 시인 소개

 

 

김소월 시인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 본관은 공주로 본명은 김정식이지만 본명보다 소월(素月, 흰 달)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냈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와 장경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 리)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에 시달리면서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왔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던 오산학교 중학부로 진학했다. 오산학교 재학 중이던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났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 잡았다. 김소월의 대표 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학교 시절 사귀었던 여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였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이후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과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의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했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약 4개월간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머무는 동안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소설가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광산이 경영 실패로 망한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 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하며 사망 당일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샀다는 기록이 있어서 "김소월이 빈곤에 시달리다가 아편을 먹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고는 했다가 아편 과다 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