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관한 시
바람
곽재구
바람이
사스레피 꽃 자주색 가지에 앉아
박하사탕 두 알 줄 터이니
방금 쓴 시를 다오 한다
나는 박하사탕 두 알과 시를 바꾸었는데
강변 토끼풀 꽃들이 그것을 알고
주세요 주세요 하얀 손바닥을 내미는 것이었다
- 곽재구,『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바람에게 말한다
김남조
바람은 안 보인다 하는가
나뭇잎 수런거림이
바람의 모습
강기슭 잔물결은
바람의 문양
앞뒤좌우 바람손님이니 나는
바람과의 동거여라
바람에게 말한다
긴 세월 바람 있어 환하게 잘 지냈는데
오늘도 눈 밝고 귀 밝아
바람을 알아보니
지극 감사하다고
바람에게 말한다
세상에 못다 갚을 내 모든 은혜의 빛을
바람에게 물려줄 일
미리 사죄한다고
바람과 살았으니 바람 외엔
상속자가 없다고
- 김남조,『심장이 아프다』(문학수첩, 2013)
바람의 노래
최영철
나는 비록 꽃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를 견딘 매화나무 기다림이 욕되지 않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나는 비록 새가 아니어도 좋으니 나를 잃고 먼 하늘을 헤맨 소쩍새의 소망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나는 비록 밥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를 찾아 온 눈밭을 들쑤신 살쾡이의 배고픔이 슬프지 않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나는 천근만근이어도 좋으니 내 안의 무게에 저것들이 떠메고온 짐 다 얹어달라 빌었습니다 내 안에 숨긴 고운 꽃다발 풀어 저것들의 길 위에 뿌려달라 빌었습니다 오래 더 오래 저것들의 등을 어루만질 수 있게 남은 두 손 잘게잘게 부수어달라 빌었습니다
- 최영철,『호루라기』(문학과지성사, 2006)
바람의 무늬
길상호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까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다르고
나의 생각들도 좇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 길상호,『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
바람의 묵비
정호승
나는 운주사를 지나며 대웅전 풍경 소리를 울렸을 뿐
가끔 당신의 마음속 닫힌 문을 두드리는 문소리를 크게 내었을 뿐
당신이 타고 가는 기차가 단양철교 위를 지날 때
기차 지붕 위에 올라가 가끔 남한강 물결 소리를 내었을 뿐
한번은 목포항을 떠나는 당신의 뱃고동 소리에 천천히 손수건을 흔들었을 뿐
묻지 마라 왜 사랑하느냐고 다시는 묻지 마라
바람인 나는 혀가 없다
- 정호승,『여행』(창비, 2013)

바람의 집
기형도
- 겨울 판화 1
내 유년 시절 바람의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 기형도,『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문학과지성사, 2019)
바람에 관한 시 6편
바람에 관한 시 바람의 두께안도현 씨근덕씨근덕 그렇게도 몇날을 울던제 울음소리를 잘게 썰어 햇볕에다 마구 버무리던매미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때맞춰 배롱나무는 달고 있던 귀고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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