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관한 시

바람의 두께
안도현
씨근덕씨근덕 그렇게도 몇날을 울던
제 울음소리를 잘게 썰어 햇볕에다 마구 버무리던
매미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때맞춰 배롱나무는 달고 있던 귀고리들을 모두 떼어냈습니다
울음도 꽃도 처연한 무늬만 남았습니다
바람의 두께가 얇아졌습니다
- 안도현,『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바람의 길
조용미
창 밖에 바람이 불고 있다
웅 웅
불길하게, 지상의 모든 전깃줄을 다 쓰다듬으며
바람은
이승의 옷자락을 흔들어대고 있다
검은 비닐봉지가
창 밑에서 휙 솟았다 날아간다
이런 날이면 바람의 길을 묻는 자들이
길가에 무리지어 나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기도 할 것이다
아주 높은 곳에서
바람의 길을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다
바람의 길 저쪽에
나를 아는 누가 서 있다
- 조용미,『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창작과비평사, 2000)

바람 나그네
문현미
바람결에 언뜻,
눈물 없는 소리 울음을 들은 적 있는가
흩어졌다 다시 몰려 쌓이는
수천 겹 바람의 지층
얼마나 가파른 어둠의 협곡을 넘어왔을까
쏴아ㅡ 쏴아ㅡ 아우성치며 온몸으로 휘몰아 가는
선천성 유목의 날개 아래
사무치게 날카로운 시간이 스쳐 지나간다
있는 듯 없는 듯 허공의 벼랑을 오르내리며
투명의 눈동자를 수직으로 지향하는
무한 공중의 거대한 자유여, 힘이여
무게가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화엄 산맥을 넘나드는
천의 얼굴을 지닌
무소유
- 문현미,『아버지의 만물상 트럭』(시와시학, 2012)

바람
정연복
고단하지 않은 생명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너른 대기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 끝
잎새에 내려앉아
가쁜 숨 잠시 고르다가도
이내 바람은
총총히 떠난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그 다음의 거처로
흐르고 또 흐르는
바람이여

바람이 불어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바람이 오면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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