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의 시

겨울 저녁
도종환
찬술 한잔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겨울밤은 좋다
그러나 눈 내리는 저녁에는 차를 끓이는 것도 좋다
뜨거움이 왜 따뜻함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며
찻 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겨울 저녁
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고 쓰던 붓과 화선지도 밀어놓고
쌓인 눈 위에 찍힌 산짐승 발자국 위로
다시 내리는 눈발을 바라본다
대숲을 흔들던 바람이 산을 넘어간 뒤
숲에는 바람 소리도 흔적 없고
상심한 짐승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여러날
그동안 너무 뜨거웠으므로
딱딱한 찻잎을 눅이며 열기를 낮추는 다기처럼
나도 몸을 눅이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도종환, <사월바다,(창비, 2016)> 중 "겨울 저녁"-

겨울 나기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문학동네, 2012)> 중 "겨울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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