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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만해문예대상 '천양희' 시인의 시와 시인 소개

천양희 시인의 시와 시인 소개

 

 

저 모습

 

하루를 살다 죽는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천일을 물 속에서 보낸다

스무 번도 넘게 허물을 벗는다

 

하루를 살기 위해

일주일을 살다 죽는 반딧불은

일주일을 살기 위해

수컷을 유혹해 알을 갖는다

꽁지에 불을 뿜고 날아다닌다

일주일을 살기 위해

 

허물도 벗지 않고

불도 뿜지 않고

오십 년도 넘게

잘도 사는 나여

 

 

 

파지(破紙)

 

그 옛날 추사(秋史)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증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추사(秋史) 김정희

추사(秋史)는 추상(秋霜)같이 엄정한 금석서화가(金石書畵家)란 의미로 자신을 이른 명호입니다.

즉, 추사는 가을 서리같이 엄정한 금석학자이자 서화가란 의미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 

 

추사체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 시인 소개

천양희 시인

 

 

 

2023년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천양희(81) 시인은 수상 소식을 듣자 등대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등대는 우뚝 서서 뱃길을 멀리 비추고 있었어요. 그 등대가 시 알 수 없어요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했던 만해 시인의 푸른 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시인은 이번 수상이 혼란한 이 시대에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묻는 것 같다라며 물질에는 눈이 밝으면서 정신을 잃고 있는 요즘, 만해 시인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켜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천양희는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전업 시인의 삶을 고수해 왔습니다. “생활이 궁핍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이 시대가 정신적으로 궁핍한데, 물질의 만족 때문에 정신의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이화여대 국문과에 다니며 이른 나이에 등단했지만, 첫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을 내기까지 18년이 걸렸습니다. 폐결핵과 가족 문제를 비롯한 육신의 고통이 그를 세상과 시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시인은 44년 전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세상을 등질 생각으로 전북 부안의 직소폭포에 갔었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 몇 시간을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너는 죽을 만큼 살았느냐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고, 폭포 소리만 요란했습니다. 죽을 만큼 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 살기로 했죠.”

그가 대표작으로 꼽는 시 직소포에 들다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직소폭포

 

직소포에 들다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바위들이 몰래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창비1994. 10.

 

 

시인은 초기 작품에선 절망 속 인간의 실존을 그려냈지만, 여섯 번째 시집 마음의 수수밭’(1994)부터 희망의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처를 꽃으로 피우는 게 내 시의 주제라고 말하는 그는 고통의 세월에서 희망을 길어 올립니다.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수수밭

 

 

 

 

시인은 지금까지 아홉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비롯한 상을 다수 받으며 작품 세계를 인정받았습니다. 2017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천양희는 시인이란 직업을 자연을 쓰는 서기에 비유합니다.

자연은 많은 생명을 품고 있어요. 그걸 받아쓰는 게 시라고 생각합니다.”

 

쓰는 과정은 치열하다. 그는 적막이라는 무서운 짐승을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고독하게 준비를 한다라며

종이의 모서리가 절벽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절벽에서 안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며 시를 짓는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위기 의식을 가지며, 새로워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 쓰기는 제게 괴로운 기쁨입니다.”

시인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비틀려 있습니다. 펜으로 글씨를 눌러 쓰는 탓에 관절염이 생겼지요

. “통증이 심해 항상 파스를 바릅니다. 손가락을 보며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생각해요. 더 구부러져도 좋으니까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 이번 수상 소감을 우체국에 가서 빠른 등기로 기자에게 부쳤습니다.

 

시집 수백권을 보낼 때도 일일이 손으로 주소를 쓰는데, 우체국 사람들이 감탄하더군요. 내 손으로 써도 되는데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디지털 사회는 전자 사막 같습니다. 위로받을 곳 하나 없지만, 시가 오아시스가 될 수 있어요.”

 

시인은 상을 받는 기쁨이 크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는 슬픔이 함께 느껴진다라고 했습니다. “폭우, 폭염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봤습니다. 이 시대에 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커요. 시로 사람들의 마음을 빚어서, 마음을 살리는 게 시인의 일이겠지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만해 한용운

 

만해대상

 

만해대상은 만해 한용운(1879~ 1944) 선생의 삶과 그가 꾸었던 꿈을 기리는 상이다. 2023만해대상 시상식은 만해축전(811~14) 기간인 812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립니다. 만해축전은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강원도, 인제군, 동국대 그리고 조선일보사가 공동주최합니다.

 

 

만해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