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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시 읽는 밤

8월 시 읽는 밤

허수경 시인

 

"시가 쓰여지는 순간은 참으로 우연하게 온다. 삶을 통과하는 모든 순간은 우면과 우연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매일 걷는 거리에서 어제는 보지못했던 난민을 오늘 볼 때, 운전을 하고 가다가 갑자기 비둘기가 사이드미러를 때리고 지나가서 갓길에 차를 급정거해야 할 때...... 등등의 수많은 우연의 순간에서 시는 나온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한시라도 시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균열의 순간에 균열을 경험하지 못한다. 순간을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비슷한 순간을 시 언어로 만들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비슷하지 그 순간이 아니다. 균열을 감지할 때 온전히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몸을 정확하게 통과하지 않는 범상한 시를 나 역시 많이 쓰고 살았다. 내가 쓴 범상한 시들은 나를 괴롭힌다. 아무리 퇴고를 하고 또 해도 그 범상함은 숨겨지지 않는다. 나의 게으름이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24시간 불을 밝혀놓고 시라는 물건을 제조하는 기계가 아니지 않은가? 시라는 물건을 파는 24시간 문이 열린 편의점은 더더욱 아니다."(358~359)

 

-허수경,<가기 전에 쓰는 글들, (난다, 2019)> "시인이라는 고아(부분)"-

 

 

 

 

 

허수경 시인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공원에 앉아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네

이 시간에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빛이 내리는 것을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허수경,<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이 가을의 무늬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여름을 촘촘히 짜내렸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무려진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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