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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수첩 : 허수경 시인의 시

원폭수첩 : 허수경 시인의 시

 

 

합천

 

 

 

 

 

 

원폭수첩 1 / 허수경 (1964~2018)

 

버섯처럼 달아오르는 죽음의 잠 속으로 다시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다면

달아오르는 아득한 저 꽃떼 사이

은밀한 자리 있어

썩어가는 이 육신 눕힐 수 있다면

 

그러나 지금은

히로시마 지하부품공장

쇳가루로 날리는 식민지 백성 천대에 묻혀

조국도 동포도 외면했던 내 썩은 삭신 사이사이

더럽게 진물 이는 고름 흐르네

 

죽음조차 고통스러워 고통스러워

삶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아 죽을 때라도 아련히 취하여

양귀비 먹고 아련히 취하여

다시 태어나면 돌아오지 않으리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으리

식민지 백성으론 돌아오지 않으리

 

- 허수경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허수경 원폭수첩 1함께 읽기

 

허수경은 이 연작의 첫 시부터 독자를 원폭이 터지는 순간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폭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역사는 1945년에 끝났지만, 사람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수첩'이라는 제목의 의미

먼저 제목을 보면 '원폭시'가 아니라 '원폭수첩'입니다. '수첩'은 거창한 기록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만나 적어 놓은 메모,

길에서 들은 이야기, 사라질 것 같은 기억을 붙잡기 위한 작은 기록입니다.

 

허수경은 자신이 역사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적는 사람이다."  라는 자세를 취합니다.

이 겸손한 태도가 시 전체를 이끌어 갑니다. 허수경이 바라본 사람들

 

그녀는 합천에서 피폭 생존자들을 만나며 시를 썼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몸에는 병이 남아 있었고, 가족에게조차 상처를 쉽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허수경은 그 침묵을 시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습니다.

 

 

왜 화를 내지 않을까?

 

많은 전쟁시는 분노를 외칩니다. 하지만 허수경은 다릅니다. 조용히 묻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 질문이 독자의 마음을 흔듭니다.

 

 

합천이라는 장소

 

합천은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가 가장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허수경에게 합천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을'입니다. 낮에는 평범한 농촌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이 다시 깨어나는 곳.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밤이 자주 등장합니다.

 

밤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기억이 돌아오는 시간, 죽은 사람을 만나는 시간,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볼 질문

 

허수경은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전쟁은 정말 끝났는가?"

총성이 멈췄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 전쟁이 남아 있다면, 그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밀려오는 복통으로 잠 못 이뤄 퉁퉁

부은 두 다리 주무르는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원폭의 밤

 

칠흑 같은 어둠 저 너머

소녀는 실려가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사십만 목숨이

일거에 도륙되던 그날

번쩍이는 섬광 눈부신 불길이 오르고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미치게 살 타는 비릿내

구역질 나는 거리

폐허의 거리를 트럭은 시체를 싣고

미처 숨 놓지 못한 목숨들도

마구 싣고

바다에 버리고 불로 태우고 구덩이에 묻던

 

원폭의 도륙보다 더 짐승 같은

도륙 속에

 

트럭 꽁무니에 매달려 애원하던 소녀

온몸에 불을 뒤집어쓰고

남은 숨 모두어

통곡하던 소녀

살려주세요 난 아직 안 죽었어요

 

학도보국대 미쓰비시 군수공장 잡역부

검은 몸뻬 목노발

검은 밥에 소금국

눈부신 꽃세월 마른버짐으로 피어나던

조선 소녀여

 

 

 

—허수경, 「원폭수첩 2」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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