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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영미 시인의 시 19편

최영미 시인의 시 19편

 

 

<또다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불꺼진 방마다 머뭇거리며, 거울은 주름살 새로 만들고

멀리 있어도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

기지개 켜는 정충들 발아하는 새싹의 비명

무덤가의 흙들도 어깨 들썩이고

춤추며 절뚝거리며 4월은 깨어난다

 

더러워도 물이라고, 한강은 아침해 맞받아 반짝이고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가 짧게 울려퍼진 다음

9시 뉴스에선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귀엣말을 나누고

청년들은 하나 둘 머리띠를 묶는다

 

그때였지

저 혼자 돌아다니다 지친 바람 하나

만나는 가슴마다 들쑤시며 거리는 초저녁부터 술렁였지

발기한 눈알들로 술집은 거품 일듯

부글부글 취기가 욕망으로 발효하는 시간

밤공기 더 축축해졌지

너도 나도 건배다!

딱 한잔만

그러나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는 노래는 겁없이 쌓이고

화장실 갔다 올 때마다 허리띠 새로 고쳐맸건만

그럴듯한 음모 하나 못 꾸민 채 낙태된 우리들의

사랑과 분노, 어디 버릴 데 없어

부추기며 삭이며 서로의 중년을 염탐하던 밤

새벽이 오기 전에 술꾼들은 제각기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택시이! 부르는 손들만 하얗게, 텅 빈 거리를 지키던 밤

4월은 비틀거리며 우리 곁을 스쳐간다

 

 

최영미 시인의 시 19편

 

 

 

 

<시>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전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 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 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니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의 한 문장으로 똑떨어지는 고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차이면

쩔렁!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불면의 일기"-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어떤 별도 쏟아지지 않았다

 

고독은 이 시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는다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 도시

끝에서 끝으로 노래가 끊이지 않고

십 년 보다 긴 하루가 뒤돌아 제 그림자를 지워나갈 때

지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마시려 버스를 탄다

밤은 멎었지만 밤보다 더 어두운 저녁에

차창 가에 닻을 내린 한숨이 묻어둔,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아직도 낯선 과거를 불러낸다

서로 빠져나오려 싸우는 기억들이 서로를 삼키는 시간

왜?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은…… 용서하지 못하는가

잃어버린 삶의 지도를 찾아 그리는

눈동자 속에 흔들리며 떠 있는 나무 한 그루, 병든 잎들이

바람에 몸을 떨며 아우성친다

얼마나 더 흔들려야 무너질 수 있나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총천연색으로 시위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멀리 하늘의 별을 비웃고

딸꾹질하듯 저녁에 어이없이 넘어가는데

지난날의 들뜬 노래와 비명을 매장한 뒷골목을 순례하며

두리번거린다

조각난 상념들을 꿰맞추며 두리번거린다

 

아,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창작과비평사, 1998)> 중 "불면의 일기"-

 

 

 

"사랑의 힘"-

 

 

커피를 끓어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히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을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 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 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시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끊어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최영미,<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중 "사랑의 힘"-

 

 

 

 

 

편집회의

 

 

쌈박한 서정시 없을까

(세상이 쌈박하지 않은데 어떻게 시만 쌈박해)

3월 4월까지 기다려 봐

봄바람이 불면 내 속에서 시가 피어날지도

 

연애시를 전진 배치해

풍자시를 뒤로 빼자

풍자보다 사랑이 좋지

세상을 바꾸는 건 풍자가 아니라 사랑이야

 

축구 경기를 틀어놓고도

방금 쓴 시에 붙들려

벽을 때리는

‘골’ 소리가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빠지는

이런 열정이 다시 날 찾아올까

 

산뜻하게 잘 빠진 연애시를

내가 또 쓸 수 있을까

상처를 받아야 시가 나오는데...

실연 좀 당해 봤으면 좋겠다

실연(씩이나!) 당할 멋진 남자가 있어?

누나는 그동안 지나간 감정 우려먹었잖아

연애의 추억으로 연애시 만들었잖아

 

그래

근데

추억하기도 이제 지겹다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아

잇몸이나 안 아프면 좋겠다

오늘 밥은 내가 살게

 

 

 

 

내 마음의 지중해

​

갈매기 울음만 비듬처럼 흐드득 듣는 해안

​

바람도 없고

파도도 일지 않는다

​

상한 몸뚱이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물결만 아프게 부서지는

​

지중해, 내 마음의 호수

너를 향한 그리움에 갇혀

넘쳐도 흐르지 못하는

불구(不具)의 바다.

​

그 단단한 고요 찾아 나, 여기 섰다

내 피곤한 이마를 잠시 데웠다 떠나는 정오의 햇살처럼

자욱히 피어올라 한점 미련 없이 사라지는 물안개처럼

아무 흔적 없이

널 보낼 수 있을까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남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고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나의 여행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펼치면

거기쯤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떠나온 고향이

 

흥분의 지퍼를 밀고 당기고

가방 속에 아침과 저녁이 들어왔다 나갔다

자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미 진이 빠져

 

터미널에서 내려

무서운 자유의 광풍이 불면

 

전(숲) 생애를 끌고 어그적 어그적.

하룻밤 잘 곳을 찾아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최영미“

 

 

적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이 문장을 이해하는 자

이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

 

누구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5분 안에 웃길 수 있다

 

나의 본질을 꿰뚫은 어떤 개그맨에게

이 시를 바친다

 

-최영미, <공항철도, (이미출판사, 2021)> 중 "최영미"-

 

 

 

"괴물"-

 

En선생 옆에 안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고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이미출판사, 2019)> 중 "괴물"-

 

 

 

독이 묻은 종이

 

대한민국 법원에서 보낸 소장을 받고

나는 피고 5가 되었다

 

두터운 종이에 쪽수도 매겨 있지 않았다

이걸 내가 왜 읽어야 하지?

 

한 편의 짧은 시를 쓰고,

100쪽의 글을 읽어야 하다니

 

아름답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문장들

쉼표도 찍히지 않은,

골치 아픈

적대감으로 가득하나 마지막은 '합니다'

정중하게 끝을 맺은

독이 묻은 종이를 읽고 싶지 않아

내가 아끼는 원목가구를 더럽힌다는 게 분했지만,

서랍장 위에 원고와 피고 5를 내려놓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최영미,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이미출판사, 2019)> 중 "독이 묻은 종이"-

 

 

 

"팜므파탈의 회고"-

 

내가 칼을

다 뽑지도 않았는데

그는 쓰러졌다

그 스스로

무너진 거다

 

Revenge is a dish

unlike pizza

best served in cold

 

《World Soccer》 잡지에서 오려낸

이탈리아 속담을 오래도록 물고 다녔다

단맛이 없어질 때까지

 

FC 바르셀로나가 리그 하위 팀에 패한 뒤

감독이 경질되었고

 

나는 뜨거운 사막을 걸었다

모래에 파묻힌

칼날이 반짝였다

나를 노리고 있었다

 

오아시스 호텔에서 수영을 즐기고

수박 주스를 마시고

지루한 소문이 귀걸이처럼 달린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나갔다

 

-최영미,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울었다, (이미출판사, 2024)> 중 "팜므파탈의 회고"-

 

 

"정치인"-

 

5천만의 국민을 감히 사랑한다고

떠드는 자들

 

사랑을 먈하며

너는 숨도 쉬지 않니?

 

조찬과 오찬과 만찬에 참석해

축하하고 격려하고 약속하고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왼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고

보도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여우들

 

사장이나 대표이사, 회장이고 위원장이며

고문이자 총재인 사람들

어제의 적과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밥을 먹으며 회의를 하는 자들

 

카메라 앞에서 밥을 먹으며

어떻게 소화가 되니?

 

얼굴에 1억짜리 미소를 바르고

장애아동의 몸을 씻기며

향수를 뿌린 목소리로

 

고통을 말하며

너는 어쩜 그렇게 편안할 수 있니?

 

-최영미,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울었다, (이미출판사, 2024)> 중 "정치인"-

 

 

"한국의 정치인"-

 

대학은 그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기업은 그들에게 후원금을 내고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병원은 그들에게 입원실을 제공하고

비서들이 약속을 잡아주고

운전사가 문을 열어주고

보좌관들이 연설문을 써주고

말하기 곤란하면 대변인이 대신 말해주고

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고

집 안 청소나 설거지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도대체 이 인간들은 혼자 하는 일이 뭐지?)

 

-최영미,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울었다, (이미출판사, 2024)> 중 "한국의 정치인"-

 

 

 "권력의 얼굴"-

 

악수를 잘해야

성공적인 대통령

묵념을 잘해야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의 정적이 죽은 다음 날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고

비석과 화환에 둘러싸인 가면

 

텔레비전으로 최고 통치자의 슬픔이 생중계되는

지금이 가장 약해 보이는 순간,

눈가의 주름과 뾰루지가 화면에 잡히고

검정 조문복을 입고 분향하는

엉덩이에서 총알이 튀어나온다

(내 뒤에서 까불지 마!)

 

하늘을 겨눈

조총 소리에 놀라 가면이 벗겨지고

땀을 닦으며 잠시 길을 잃은 권력이

카메라 앞에서 평정을 되찾는다

 

우리는 언제쯤 묵념을 못하는

서투른 대통령을 보려나?

 

-최영미,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울었다, (이미출판사, 2024)> 중 "권력의 얼굴"-

 

 

 "가을바람"-

 

가을바람은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밤 별들을 못 견디게 빛나게 하고

가난한 연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헤매는 거리의 비명과 한숨을 몰고 와

어느 썰렁한 자취방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그리고 생각나게 한다

지난 여름을, 덧없이 보낸 밤들을

못 한 말들과 망설였던 이유들을

성은 없고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낡은 앨범 먼지를 헤치고 까마득한 사연들이 튀어나온다

 

가을바람 소리는 속절없는 세월에 감금된 이의 벗이 되었다, 연인이 되었다

안주가 되었다

 

가을바람은 재난이다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 중 "가을에는"-

 

 

 "내 속의 가을"-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ㄷ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을

 

-최영미,<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중 "내 속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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