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모란 그늘의 돌
저녁 술참
모란 그늘
돗자리에 선잠 깨니
바다에 밀물
어느새 턱 아래 밀려와서
가고 말자고
그 떫은 꼬투리를 흔들고,
내가 들다가
놓아둔 돌
들다가 무거워 놓아 둔 돌
마저 들어 올리고
가겠다고
나는 머리를 가로젓고 있나니......
자화상
애비는 종이 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견우의 노래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가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연 허이연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곶감 이야기
맨드래미 물드리신 무명 핫저고리에,
핫보선에, 꽃다님에, 나막신 신고
감나무집 할머니께 세배를 갔네.
곶감이 먹고 싶어 세배를 갔네.
그 할머니 눈창은 고추장 빛이신데
그래도 절을 하면 곶감 한 개는 주었네.
"그 할머니 눈창이 왜 그리 붉어?"
집에 와서 내 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까
"도깨비 서방을 얻어 살어서 그래"라고
내 할머니는 내게 말해주셨네.
"도깨비 서방 얻어 호강하는 게 찔려서
쑥국새 솟작새같이 울고만 지낸다더니
두 눈창자가 그만 그렇게
고추장빛이 다아 되어버렸지
눈물 나네
눈물 나네 눈물 나네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 서울 하늘에
오랜만에 흰 구름 보니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틀의 연휴에
공장 쉬고
차 빠져나가
이 서울 하늘에도
참 오랜만에
검은 구름 걷히고
흰 구름이 떠보이니
두 눈에서
눈물이 다 나오시네.
동천(冬天)
내 마음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겨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무등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 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 쳐 위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려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 두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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