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관한 시 - 10편

1. 9월의 기도 / 이해인
저 찬란한 태양
마음의 문을 열어
온몸으로 빛을 느끼게 하소서
우울한 마음
어두운 마음
모두 지워버리고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9월의 길을 나서게 하소서
꽃 길을 거닐고
높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다보며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이 있게 하소서
꿈을 말하고
꿈을 쓰고
꿈을 노래하고
꿈을 춤추게 하소서
이 가을에
떠나지 말게 하시고
이 가을에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2. 사랑하기 좋은 9월에는 / 윤보영
9월입니다
산과 들이 넉넉한 9월입니다.
내 마음도 따라
넉넉한 9월
행복한 마음으로
함께 할 9월
알고 보면 9월도
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게
9월도 아름답게 보내겠습니다
풀잎 냄새가 연하고
나뭇잎 냄새가
부드러운 걸 보
9월도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9월은 넉넉한
10월에는 못 미치고
열정 넘치는 8월만은
못할 수 있지만
9월도 나에
소중한 달입니다.
소중한 만큼
따뜻한 마음으로
보내겠습니다.
3. 9월의 노래 / 이채
나도 한때 꽃으로 피어
예쁜 잎 자랑하며
그대 앞에 폼 잡고 서 있었지
꽃이 졌다고 울지 않는다
햇살은 여전히 곱고
초가을 여린 꽃씨는 아직이지만
꽃은 봄에게 주고
잎은 여름에게 주고
낙엽은 외로움에게 주겠네
그대여!
빨간 열매는 그대에게 주리니
내 빈 가지는 말라도 좋겠네
4. 중년의 가슴에 9월이 오면 / 이채
사랑하는 사람이여
강산에 달이 뜨니
달빛에 어리는 사람이여
계절은 가고 또 오건만
가고 또 오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여
내 당신 사랑하기에
이른 봄 꽃은 피고
내 당신을 그리워하기에
초가을 단풍은 물드는가
낮과 밤이 뒤바뀐다 해도
동과 서가 뒤집힌다 해도
그 시절 그 사랑 다시 올리 만무하니
한 잎의 사연마다 붉어지는 눈시울
차면 기우는 것이 어디 달뿐이랴
당신과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당신과 나의 삶이 그러하니
흘러간 세월이 그저 그립기만 하여라
5. 9월 / 문인수
무슨 일인가, 대낮 한 차례
폭염의 잔류부대가 마당에 집결하고 있다.
며칠째, 어디론가 계속 철수하고 있다.
그것이 차츰 소규모다.
버려진 군용 텐트나 여자들같이
호박넝쿨의 저 찢어져 망한 이파리들
먼지 뒤집어쓴 채 너풀거리다
밤에 떠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몇몇 집들이 더 돌아와서
또, 한 세상 창문이 여닫힌다.
6.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7. 9월 / 반기룡
오동나무 뻔질나게
포옹하던 매미도 갔다
윙윙거리던 모기도
목청이 낮아졌고
곰팡이 꽃도 흔적이 드물다
어느새 반소매가
긴 팔 셔츠로 둔갑했고
샤워장에도 온수가
그리워지는 때가 되었다
푸른 풀잎이
황톳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메뚜기도 한철이라
뜨겁던 여름 구가하던 보신탕집 문지방도
먼지가 조금씩 쌓인다
플라타너스 그늘이 구멍 뚫린 채
하늘이 푸르디푸르게 보인다
짝짓기에 여념 없는 고추잠자리
바지랑대가 마구 흔들린다
8. 구월 / 헤르만 헤세
뜰이 슬퍼합니다.
차디찬 빗방울이 꽃 속에 떨어집니다.
여름이 그의 마지막을 향해서
조용히 몸서리칩니다.
단풍 진 나뭇잎이 뚝뚝 떨어집니다.
높은 아카시아나무에서 떨어집니다.
여름은 놀라, 피곤하게
죽어가는 뜰의 꿈속에서 미소를 띱니다.
오랫동안 장미 곁에서 발을 멈추고
아직 여름은 휴식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천천히 큼직한
피로의 눈을 감습니다.
9. 갱년기의 9월 / 강민경
9월 맞는 뼈 끗에
쌓이는 바람의 촉수
내게 수상쩍은 통지서를 내미네요
시리도록 투명한 햇살에
나뭇잎이 스치는 바람처럼
거둬 간직할 수도 없는 흰 구름처럼
나는 내 몸을 송두리째 내주어
지글거리는 신열을 다스린 등줄기에
얼음물 끼얹는 세월 유정함에
높아만 가는 하늘이었네요
세월이 세월을 불러
바람을, 흰 구름을,
누렇게 물든 벼이삭에,
잔가지에 매달려 붉어지는 사과에
갱년기 고개 넘는 법을 가리키며
동동걸음 쳤던 한 호흡 사이는
태양이 여름을 분탕(焚蕩)을 치다 지쳤을 때
혼이 맑아지듯
제가 지워지는 줄도 모르는
숨 막히는 절정
제 살점 녹여 키워낸 장성한
아이들 보여 준, 훈훈하고 확확 거리는
확실한 메시지였지요
10. 9월 / 권오범
봄부터 시도 때도 없이 쥐어짜
너덜너덜해진 구름
하늘이 아무렇게나 널어
솜처럼 보송보송 말려놓은 추석 단대목
새물 내 머금은 바람
조석으로 오스스 내려와
열린 창 핑계 삼아 무단 침입해
닭살 돋도록 경망스럽게 살랑거리지요
언제부턴가 귀뚜라미 소리가
이명처럼 은근히 뇌로 파고들어
이 마음 이간질해 대는 것이
가을이 분명한가 보다
뜨락을 무성하게 점령한 채
광신적으로 하늘 우러러 사랑 구걸하는
코스모스 떼 아우성에 질렸는지
대추들도 붉으락푸르락 늙어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