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에 관한 시 7편

나리 나리 개나리
기형도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힌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컹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개나리
나태주
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들 가들 턱 떨려라,
따슨 봄인가 빠끔히 창문 열고 나왔다가
되서에 얼어 짓무른 손톱 끝 발톱 끝..
여덟 식구 밥시중 옷시중 설거지까지 마치고
손에 묻은 물기조차 씻을 새 없이
종종걸음 쳐 가던 등굣길의 언 손 아이 내 누이야.
그렇지만 매양 지각하여
얼음 백힌 손을 쳐들고 벌을 서야만 했던 내 누이야.
너를 생각하면 지금도 두세두세 가슴 저려라,
밥 짓기 설거지 빨래하기 싫다고
서울 와서 뒷골목 두터운 그늘에 깔려
어리배기 천치의 눈을 치뜨고 섰는 무다리..
내 고향의 숫배기 누이들의 무다리..
너희들의 상업은 또 오늘 밤
한 묶음에 얼마씩 팔려가야만 한다는 거냐!
개나리꽃
나태주
개나리꽃가지 꺾어 머리에 꽂고
종종걸음 따라나서는 어린 딸년의 봄맞이
아무렴, 내게 무슨 봄맞이가 당한 일인가?
잔병치레로 눈 못 뜨는 이 눈부신 봄날 햇빛 속.
개나리 꽃대에
나태주
개나리 꽃대에 노랑불이 붙었다. 활활.
개나리 가늘은 꽃 때를 타고 올라가면
아슬아슬 하늘나라까지라도 올라가 볼 듯 …
심청이와 흥부네가 사는 동네 올라가 볼 듯 …
새치골 개나리
김해화
남자들 공장 가고 공사장 간 사이
닭 쫓는 개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가슴에 불 하나씩 켜 놓고 사는 사람들
촉수 낮은 불빛들 깨뜨려 놓고
닭집 부수고 개집 부수고
쫓기는 달구새끼들처럼
우르르 몰려가 버린 시청 철거반들
가슴이 캄캄해서
어젯밤 늦도록 깨진 불빛들 긁어모아
불 지펴 놓고
소주잔 기울이던 사람들
오늘은
아침까지 가로등 하나 불 켜 놓고
불빛 조금씩 나누어 갖는지
공사장 출근길 조용하고
민병국씨 집 울타리
조그만 개나리꽃
사람들 가슴에 되살아나는 불빛처럼
노오랗게 피어납니다
개나리꽃
이정록
개나리 활대로 아쟁을 켠다
아쟁은 아버지 같다, 맨 앞에 앉아 노를 젓지만
물결소리는 가라앉고 거품만 부푼다
황달에서 흑달로 넘어간 아버지
백약이 무효인 개나리 울 아버지
해묵은 참외꼭지를 빻아서 콧구멍에 쏟아붓고는
숨넘어가도록 재채기를 한다, 절대 안 되여
사약이여 사약, 한약방에서 절레절레 고갤 흔든
극약처방이 노란 콧물을 뿜어 올린다
오십 년 묵은 아버지 콧구멍, 개나리꽃사태다
이렇게 살어 뭐혀, 두두두 무너지는 북소리
몸 뒤집은 아쟁이 마룻장을 두드린다
이제는, 배도 노도 갈앉은 지 십수 년
속 빈 개나리 활대로 아쟁을 켠다
개나리나무는 내공 깊은 속울음이 있다
마디도 없는 게 악공이 되는 까닭이다
개나리 꽃그늘에 앉으면 자꾸만 터지는 재채기
아쟁소리 위로 노란 기러기발 끝없이 날아오른다
다시 황달로 돌아온 아버지처럼, 봄은
극약처방 없이는 꼼짝도 않는다
개나리꽃
도종환
산속에서 제일 먼저 노랗게
봄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나
뒤뜰에서 맨 먼저 피어 노랗게 봄을 전하는
산수유나무 앞에 서 있으면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손님을 마주한 것 같다
잎에서 나는 싸아한 생강 냄새에
상처받은 뼈마디가 가뿐해질 것 같고
햇볕 잘 들고 물 잘 빠지는 곳에서 환하게 웃는
산수유나무를 보면 그날은
근심도 불편함도 뒷전으로 밀어두게 된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개나리꽃에 마음이 더 간다
그늘진 곳과 햇볕 드는 곳을 가리지 않고
본래 살던 곳과 옮겨 심은 곳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이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산동네든 공장 울타리든 먼지 많은 도심이든
구분하지 않고 바람과 티끌 속에서
그곳을 환하게 바꾸며 피기 때문이다.
검은 물이 흐르는 하천 둑에서도 피고
소음과 아우성 소리에도 귀 막지 않고 피고
세속이 눅눅한 땅이나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않고 피기 때문이다.